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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윌리엄스의 스토너 -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기에, 더 지독한 울림.

글쓰는아빠 2021. 8. 4. 08:38

이 소설은 여러모로 흥미로운 소설이다.

미국 소설이다.
그런데 유럽에서 읽혔고, 그래서 한국으로도 들어왔다.
소설의 작가, 존 윌리엄스는 이미 고인이다.
그는 아마 이 작품을 쓰며 독자들의 반응과 스스로가 하고 싶은 이야기 사이의 딜레마를,
다른 여느 작가들처럼 고민했으리라. 
그러나 그 딜레마의 대상이 되는 독자들이 
자국인 미국시민이 아니라 유럽인들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그것도 그의 사후 50년이 지나서야 인기를 끌게 되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분명 그의 고려 대상이 아니었으리라.

 

 

 

 

1. 한 남자의 이야기


소설은 윌리엄 스토너 라는 한 사내에 관한 이야기다.
사내의 인생에서 어떤 특별한 사건에 대한 기록 같은 것은 아니다. 그저 그 사내의 인생에 관해서다.
소설의 도입부터 요즘 트렌디한 소설들과는 그 궤를 달리한다.

 

 

가끔 어떤 학생이 이 이름을 우연히 발견하고 윌리엄 스토너가 누구인지 무심히 생각해볼 수도 있겠지만, 그 이상 호기심을 충족 시키려고 애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스토너의 동료들은 그가 살아있을 때도 그를 특별히 높이 평가하지 않았고, 지금도 그의 이름을 잘 입에 올리지 않는다.

 

 

그러니까 윌리엄 스토너라는 소설의 주인공은, 그의 동료들조차 단 한 번도 그가 다른 사람들과 확연히 다른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지 않은 사람이다. 그저 그렇고 그런, 그래서 그를 옆에서 지켜본 몇 명만이 겨우 그의 이름을 기억해줄 그런 인생. 
  
그런 인생에 대해서 존 윌리엄스는 소설을 썼고, 지금의 나는 그 서사물에 대해서 감상을 적어보려는 것이다.



2. 몇 번의 선택과 몇 번의 일방적인 선택강요


모든 소설의 주인공 아니, 모든 인생들이 그런 것처럼 윌리엄 스토너 역시 자신의 부모는 그의 선택사항이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는 땅의 아들로 성실하지만 가난한 농부였다. 손의 갈라진 틈으로 시커먼 흙이 베어있는 성실한 농부. 아들을 위해 더욱 성실해질 것을 다짐할 줄 아는 아버지. 다만 그 시대의 여느 농부들처럼 가난했을 뿐이다. 

윌리엄 스토너 역시 그런 아버지의 아들이니 농부가 될 팔자였다. 스토너가 대학을 가게 된 이유도 사실은 좀더 나은 농사를 짓기 위해 농업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대학을 재학하던 중 스토너는 선택을 하게 된다. 영문학을 전공하기로.

그 다음으로 그가 선택한 것은 결혼이었다. 우연찮게 파티장에서 '이디스'를 만난 건 그의 선택사항이 아니었지만, 그녀에게 구애를 펼친 건 그의 선택이었다. 그러나 곧이어 펼쳐지는 두 사람 사이의 비극은 그의 선택이 아니었다. 스토너도, 이디스도, 사랑을 몰랐다. 미숙했던 두 청춘은 사랑에 대해서 조금도 겪어보지 못한 채 그 시대의 많은 커플들이 그랬듯이 서둘러 결혼부터 했던 것이다. 

이후 스토너가 단계를 걸쳐서 교수가 되는 것도, 두 사람 사이에 그레이스 라는 딸이 태어나는 것도, 그 딸에게 스토너 혼자서만 무한한 사랑을 주는 것도, 그의 경력에 치명타를 입힐 교내의 정치적인 사건도, 딸과의 관계가 아내로 인해서 멀어지는 것도, 딸이 자라나 술주정뱅이가 되는 것도, 스토너의 인생에 난입하듯 찾아든 것이지 그가 특별히 먼저 의욕을 내세워 선택한 것은 어느 것도 없다. 이후 그의 인생에서 능동적으로 선택한 특별한 사건은 딱 두 가지만이 있다. 하나는 책을 써서 출판했다는 것이고, 하나는 사랑을 만나 불륜을 감행했다는 것. 그나마 그런 선택도 책은 그저 그렇게 팔리다 말았고, 사랑도 현실 앞에서 이별하게 되었지만...



3. 삭만한 벌판 위를 지나쳐 가는 마른 바람


소설은 그래서 조용하다.
좀체 어떤 것도 일어나지 않으며 진행되다, 결국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은 채로 스토너가 숨을 거둔다.
소설은 삭만한 벌판 위를 묘사하듯 덤덤하게 펼쳐보일 뿐이다.
끝갈데 없이 펼쳐져 있기만 하고 아무것도 없는 벌판 위에서 묘사를 한들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해가 뜨고, 달이 지듯이.
스토너의 인생에 대해 그저 덤덤하게 말해줄 뿐이다. 
그리고 이따금씩 그의 인생에 찾아드는 자잘한 희노애락이 마른 바람이 되어 독자의 뺨을 스쳐지나갈 뿐이다.


 

젊은 시절의 어색함과 서투름은 아직 남아 있는 반면, 어쩌면 우정을 쌓는데 도움이 되었을 솔직함과 열정은 사라져버린 탓이었다.

 

 

이디스는 곤히 잠들어 있었지만, 빛의 장난 때문에 살짝 벌어진 입술이 소리 없이 열정과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한참 동안 선 채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련한 연민과 내키지 않는 우정과 친숙한 존중이 느껴졌다. 또한 지친 듯한 슬픔도 느껴졌다. 이제는 그녀를 봐도 예전처럼 욕망으로 괴로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예전처럼 그녀의 모습에 마음이 움직이는 일도 다시는 없을 터였다.

 

 

 

 

4. 그의 인생을 받아들이는 건 독자의 몫이다.


다행히도 그렇기 때문에 독자는 그의 인생에 대해 어떤 각주를 달든 상관이 없다.
실패한 인생이라 불러도 좋고, 떳떳한 삶이라 해도 좋고,
그의 아버지처럼 성실하게 버티어온 삶이라 불러도 좋다.

다만 어느 쪽이든 장담하건데,
그의 인생을 정독한 당신이라면, 이 소설에 열띤 호응을 보인 유럽의 독자들처럼 지독한 울림에 한 동안 다른 건 손에 잡히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여기에 
왜 정작 미국에서는 읽히지 않고 절판된 소설이
50년이나 지나서 유럽에서 읽히기 시작한 것인지,
우리들의 서점가에서는 현재 얼만큼 읽히고 있는지 같은 것은 
불필요한 물음에 불과하다. 

그저 한 사람이 황량한 벌판을 홀로 가로질러 인생을 완성시킨 소설이다.
독자는 그 사람의 걸음걸음을 따라 가보며,
점점 더 구부정하게 굽어지는 그의 등을 바라보며,
그 감상에 젖기만 하면 그걸로 충분하다.

단언컨데,
시대에 걸맞지 않게 느슨하고 평이한 이 일차적인 서사진행은 오직 소설,
문학만이 해낼 수 있는 연출이다. 

그러니,
그저,
맛보시길 바란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영문학자가 된 남자,
취기 어린 풋사랑으로 강행한 결혼 덕에 비극을 안은 채 살아간 남자,
그저 순진하게 문학을 파는 일이 일생의 행복 중 하나였던 남자,
그걸 강연하며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던 걸 행복해 했던 남자,
결점이라곤 있을 수 없어 일생의 보물이었던 딸이 알코올중독자가 되어갔던 걸 지켜만 봐야했던 남자,
한 가정의 가장이었지만, 남들 몰래 영혼까지 사랑한 여인은 따로 두어야 했었던 
윌리엄 스토너의 일생을.

 

 

 

손가락에서 힘이 빠지자 책이 고요히 정지한 그의 몸 위를 천천히, 그러다가 점점 빨리 움직여서 방의 침묵 속으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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