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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순원의 소나기를 읽고 - 시대를 넘어서는 서정적 서사의 힘

글쓰는아빠 2021. 5. 24. 00:51
저자소개


황순원
이름 외 따로 부연설명을 할 필요가 있을까?
한국 문인들 중 간결하면서도 서정적인 묘사로는 으뜸.


1915년 평안남도 대동 출생.
1931년 17세의 어린 나이로 문단에 데뷔한 엘리트.
1934년 동경 유학.
이후 30년대 중반부터 소설을 집필하기 시작. 이전까지는 시를 써왔음.


대표작은 ‘소나기’, ‘카인의 후예’, ‘학’, ‘나무들 비탈에 서다’, ‘일월’, ‘움직이는 성’ 등이 있다.

 

 

이미지 출처 : 1979년 개봉작 영화 소나기의 스틸컷. 다음영화

 

 

 

대체 소년과 소녀의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황순원의 ‘소나기’는 중학교 국어교과서에서 읽은 소설이다. 필자는 아직도 기억이 나는 것이 국어 교과서 좌측 상단에 ‘1) 갈래 – 성장소설’ 이라고 적던 기억이다. 당시엔 국어수업 도중 시나, 소설이나, 수필이나 뭐든 문학작품만 나오면 그렇게 국어선생님께서 불러주시는 내용대로 국어책에 받아써야만 했었다. 불러주시는 내용이 제법 길기 때문에, 삐뚤삐뚤한 내 글씨를 매우 작게 기록하다 보면, 사실 어느 순간부터인가는 알아볼 수도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 수업을 들으면서 읽었기 때문에, 사실 소나기는 읽지 않아도 알고 있는 소설이라 막연히 생각을 해왔었다. 국어수업만 범인이었을까? 그때쯤이기도 했다. 지금은 유명인사인 MC 강호동이 단순히 개그맨 강호동이던 시절. 웃기기는커녕 보기에 민망한 분장을 한 강호동이 쭈미야를 외치며 전혀 웃기지 않은 슬랩스틱 걸음걸이를 선보이던 콩트의 제목도 ‘소나기’였다.

덕분에 뇌리에 강하게 박히게 된 것 중 하나가 바로 소년과 소녀의 감정에 관한 것이다. 대체 나는 왜 그 둘의 감정이 ‘미성숙한 첫사랑’의 감성이라 생각했었던 것일까? 다시 읽어본 소설 소나기의 전문 어디에도 소녀를 향한 소년의 감정을, 소년을 향한 소녀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부분은 없었다.

그럼, 사랑이 아닐 수도 있는 게 아닐까??

 

 

 

미성숙한 존재들, 동성과 이성의 경계.

 

 

미취학 아동들의 경우엔, 우리가 굳이 여아, 남아를 구분 지어서 관리하기 보단 몇 세 아동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만큼 미성숙한 존재들에겐 성의 개념을 부여하기 보단 단계적으로 존재의 가치부터 부여하고 관찰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암묵적 룰이다. 그리고 학교를 입학하는 시점에서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에 대한 구분을 두기 시작하고, 이른바 사춘기 시절이 오면,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로 구분지어 지던 관리대상 본인들이 먼저 이성을 자연스레 의식하고 경계를 만든다.

그럼, 소설 소나기 속 주인공들은 어떤가? 소년과 소녀. 보통명사로만 표기되어진 이들은 정확한 나이조차 가늠이 어렵다. 소설 전문에 나온 단서들만 보고 추리해 보자면, 대략 당시 소학교의 5학년이나 6학년쯤으로 되어 보인다. 그럼 그 학년이 사춘기를 겪을 나이인가? 이성을 의식할 또래인가? 모호하다. 둘 중 한 명이라도 교복을 입은 중학생 이상이었다면 모를까, 소설이 탄생한 시점이 6.25 전란 중이란 걸 떠올려 보면, 추측조차 조심스럽다.

확실한 건 소년과 소녀는 확실히 표면적으로는 동성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때문에 묘사되는 부분에 있어서도 두 사람의 외형은 확실히 차이가 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둘의 감정이 사랑이란 확신을 줄만한 부분도 없다. 소설 전반에 걸쳐 서로에게 다가가려 하고, 닿게 되고, 또 눈에서 멀어져 그리워하지만, 그 정도는 일반적으로 동성들이 보이는 우정의 범위 내에서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처럼 소설의 주인공들이 미성숙한 존재들로 설정되어지고, 쉽게 단정 지을 수 없는 단계에서 보이는 행동들이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수많은 상상을 빚어지게 한다. 덕분에 소설을 읽는 즐거움은 배가 되고, 문학적 깊이도 깊어지게 된다.

 

 

 

눈앞에서 미려하게 펼쳐지는 서정성이 눈을 멀게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학교 국어시간에 우린 이걸 미성숙한 존재들의 ‘첫사랑’으로 교육을 받았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이 소년과 소녀가 움막에서 웅크리고 있는 부분을 읽었을 때, 시커먼 중학생들이었던 우리가 한껏 킥킥거리며 소년은 소녀를 왜 덮치지 않느냐며 소란을 피우던 모습이다. 그러는 와중에 우린 자연스럽게 이 소설의 내용이 어린 남녀의 풋사랑으로 기억했었던 것이다.

헌데, 정말 그런 것일까??

읽는 내내 놀라웠던 것은 황순원의 문체였다. 대단히 간결해 매우 빠른 속도감이 느껴지면서도 곳곳에 미려한 문구가 문장을 다시 고쳐 읽게 만들고 있다. 이 놀라운 필력이 소나기를 영상매체로 옮기고, 또 옮기게 만든 것이 아닐까? 그러면서도 그가 소나기 소설 전체에 배치시켜둔 색상은 매우 단조롭다는 점에서 또 한 번 더 놀라게 된다.

여기서 필자는 조심스런 상상을 해본다. 이 무섭도록 놀라운 필력. 그 서정성이 텍스트를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본능을 자연스레 상상케한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 황순원의 놀라운 필력으로 무드가 잡히자 독자가 알아서 상황을 에로스하게 받아들이거나, 정서를 달달한 연애물로 오인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작가는 그저 순수한 소년소녀들의 우정을 담담하게 써 내린 것일 수도 있는데, 성인 독자들이 욕망한 바를 중학생인 우리가 배우면서 왜곡된 것은 아니었을까?

 

 

 

죽음의 관문, 이후의 소년은 정말 ‘어른’이 되었을까?

 

 

황순원은 문체가 간결하고, 묘사되는 색채 수가 적은 만큼 등장하는 인물도 조촐하다. 핵심인 소년, 소녀를 제외하곤 주변인물이 딱 4명만 등장하는데, 그 중 하나는 지나가는 행인으로 대사조차 없고, 나머지 둘은 소년의 부모로 사실상 하나의 장치로 보이기 때문에, 실제 장치로 작용하는 인물은 2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 둘의 공통점은 그들이 사건에 직접적으로는 전혀 개입하지 않으며, 주인공들이 선택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강제적인 환경적 변화, 또는 사건적 변화를 정보로 제공해주는 정도의 역할이다. 단순 정보제공자라는 장치로 작동하고 있지만, 이 인물들이 전하는 정보들은 하나같이 좋을 게 없는 소식들이다.

다시 말해, 소설 속에서 빚어지고 있는 어른들은 나쁜 소식을 전하거나 일을 원치 않는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불가항력적인 존재로만 묘사되어 매우 부정적인 존재이다. 여기서 필자는 잠시 재미난 물음을 던져본다.

그럼, 소녀의 죽음 이후, 소년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저들과 같은 ‘어른’이 되는 것일까?

황순원은 문체만큼이나 소설의 전체적인 완성도 간결하게 이루어낸다. 소녀의 죽음 이후로는 바로 소설이 끝나버린다. 거기에 소년의 감성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등은 일말의 묘사도 없다. 확실한 완결만이 남아 무수한 상상을 독자에게 안길 뿐이다.

성장은 생장(生長)이다. 어떤 목적, 완전무결한 틀이 있어 그 틀을 통과의례로 통과해야만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개별적으로 개성적인 존재들이며, 저마다의 아우라가 있다. 그 고유의 빛깔을 뿜어내기 위한 과정은 저마다 다르다. 황순원은 이 점을 정확히 인식하고 소설 소나기를 완성시켰다. 때문에 소년이 어떤 빛깔로 성장할지는 독자들에게 나름의 욕망으로 상상할 수 있는 꺼리를 선물로만 넘겨줄 뿐이다.

 

 


 

 

꽤 오래 전에 초록창에 써뒀던 글입니다.

이제 초록창에는 출판업과 관련해서 실제 진행되는 사업 내용들만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를 할 계획이라서

 

오래전에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본 후에 끄적였던 글들은

여기로 하나씩 옮겨올까 합니다.

 

옮기는 과정에서 다시 읽어보니 매우 부끄부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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