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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텍쥐페리 어린왕자 - 소실된 상상력과 고립된 자아들

글쓰는아빠 2021. 7. 26. 11:58

 

저자 소개

자유로이 비행하며 글을 썼었던 행동주의 작가. 생텍쥐페리

1900년 프랑스 리옹에서 태어나 세계1차대전을 겪었다. 군목부 시절 전투기를 몰게 되었고, 전역후에는 항공사에 취직하여 정기우편 비행을 담당하였다. 세계2차대전이 발발했을 때도 군에 재입대하여 전투기를 다시 몰았다.

비행은 그에게 단순히 직업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생활과 글쓰기의 바탕, 삶의 근간이었다. 모험과 사색, 소재의 착상 등이 비행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뿐 아니라, 사실상 비행이 어려운 육체적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굴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생애에서 그의 비행을 막아설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의 죽음 뿐이었다. 1944년 7월 31일. 그의 나이 44세. 바스티야 북쪽 100킬로미터 지점 코르시카 상공에서 적기에 피격되어 바다로 추락. 그렇게 그의 글쓰기도 중단되었다.

 

 

 

고전의 맛과 멋

 


좋은 글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길 마련이다. 그리고 그만큼 읽을 때마다 맛이 달라지는 멋도 있다. 어쩌면 우리가 ‘좋은 글’이라고 부르는 많은 글들이 이런 ‘스테디셀러’가 아닐까 한다. 

내가 『어린왕자』를 처음만난 건 정확하지는 않아도 대략 1988년도쯤일 것이다. 그러니까 초등학교 1학년인가, 2학년이 되던 그때,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내게 늘 든든한 친구가 되어주었던 것은 ‘계몽사 소년소녀세계문학전집'(전체 50권, 1978년 출판)이었다. 당시 주변의 친구들이 나의 독서량에 까무라쳤다기 보단 친구들이 학교에서 마주하던 고급 칼라코팅지의 책이 아닌, 먹지에 흑백 삽화, 그것도 삽화가 십여페이지나 이십여페이지가 지나서 간간이 나와주는 책, 딱딱한 명조체의 글씨, 폰트도 자기네들이 보던 것보다 3분의 1밖에 되지 않는 책을 내가 혼자서 재미나게 읽는다는 사실에 경악을 하곤 했었다.

 

여튼 그 당시, 그 정도 독서량을 지니고 있던 소년이었음에도, 나는 『어린왕자』를 무척 지루하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대부분 무슨 말인지 이해못할 부분이 너무 많아서 대충대충 읽고 넘겼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모아뱀의 그림이라든지, 어른들이 숫자에 민감하고, 어른들이 아이들의 생각(정확하게는 나의 생각)을 전혀 모른다든지 하는 부분은 어린 시절의 내가 읽어도 충분히 공감이 되고, 재미가 있었다.  

덕분이었을까? 난 그래서 『어린왕자』를 중학생일 때도 읽어보았고,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읽어보았다. 중학생 때는 ‘관계맺기의 어려움’에 대해 고민할 수가 있었고, 고등학생 때는 ‘사랑에 대한 열병’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추적하는 긴 여행을 함께하는 버팀목이 되어 줬었던 기억이 난다.  

올해로 서른 넷이 된 내가 『어린왕자』를 또 다시 읽게 되었다. 그리고 딱 그동안 누적된 내 경험과 어지러워진 정서만큼 나의 ‘어린왕자’가 자라나 있었다.

 

 

 

단순한 심볼, 단순한 도식, 그러나 깊은 관계

 

 

『어린왕자』는 ‘어린왕자’가 주인공인 소설이지만, 그 ‘어린왕자’를 그리워하며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화자’는 어른인 ‘비행사’다. 이 둘의 관계가 우선 소설의 중심에 놓인다. 둘은 극단적으로 ‘어른’과 ‘아이’라는 상징에 놓이게 된다. 실제 ‘비행사’는 비행사라는 ‘직업’을 가진 어른이다. 그는 사막에서 ‘생존’하는 것을 걱정하고, 자신에게 놓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반면, ‘왕자’는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다. 정확하게는 ‘생존과 문제의 해결’같은 것들 보다는 ‘관계맺고 있는 이들’에 대한 ‘그리움’과 ‘걱정’, ‘애정’ 등이 최우선이며, ‘정서적인 부분’에 민감하다.
  

둘은 이처럼 대립적인 부분이 많지만, 재미나게도 둘은 ‘친구’가 된다. 그리고 그 단서는 ‘화자’의 내면 안에 숨쉬고 있는 ‘동심’이다. 이 ‘동심’이란 건 사실 대단한 것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분명 존재하는 것’이라고 표현되는 ‘상상력’이 그 핵심이자 기초이다. 다행히 ‘비행사’는 아직 ‘상상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왕자’처럼 ‘아이’는 아니다. 때문에 둘은 친구가 될 수는 있었지만, 가야할 목적지가 달랐고, 앞으로 관계해야할 그 대상들이 달랐다.

 

 

 

 

 

왕자가 관계를 맺은 건 비행사만이 아니다. ‘뱀’과 ‘여우’, ‘장미’도 있다. 이들은 ‘비행사’와는 또다른 관계다. 기본적으로 비행사와는 다른 ‘비인격체’들이지만, 왕자와 ‘대화’를 나눈다. 때문에 그들의 정서는 비행사 보다는 왕자와 매우 가깝다. 그들은 상상을 하고, 상대의 감성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보이지 않아도 실존하는 어떤 것이 있다고 믿는 집단이다. ‘비행사’도 그런 부분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생존’이 ‘문제해결’이 먼저인 ‘어른’이다. 그래서인지 왕자의 성장에는 비행사보다는 뱀과 여우, 장미가 훨씬 더 큰 도움을 주게 된다.

  
‘여우’를 만난 왕자는 ‘길들여지는 것’에 대해 배우게 된다. 애정을 주고 받고, 그리워하는 것이 우리들 삶에 어떤 행복과 고통을 안겨줄 수 있는지를 배우면서 왕자는 고향별에 두고 온 ‘장미’를 떠올린다. 그리고 장미와 왕자가 서로에게 준 상처와 애증에 대해 고백하며, 결국 왕자의 여행을 서둘러 마무리 짓는 결심까지 하게 만든다.
  

반면, 어떤 도움도 크게 되지 않는 인물들도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다 ‘어른’이다. ‘어린왕자’의 눈높이에서는 이해가 불가한 존재들이고, 어떤 권태와 외로움에 무너져내렸거나, 곧 무너져내릴 것 같은 이들만이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비실속적인 행동들을 무한반복하면서 오히려 실속적인 척을 하고 있다. ‘어린왕자’는 그런 그들을 그저 지나쳐 ‘비행사’와 ‘뱀’, ‘여우’, ‘장미’가 있는 지구에 도착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어른들’ 중 ‘비행사’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어린왕자의 ‘성장’에는 도움을 주지 못했고, 왕자에게 사랑과 친구, 살아가는데 정말 필요한 몇 가지들 새삼 일깨워준 건 오히려 현실세계의 ‘비인격체’들인 여우와 장미, 뱀이었다.

 

 

 

'현실의 비행사'들을 성장시키는 어린 왕자

 

 

『어린왕자』는 사실 어른을 위한 동화다. 이야기 전체를 통해 어린왕자는 자신을 둘러싼 관계와 사랑에 대해 확인하게 되고, 자신이 자각한 사실들을 옆자리에 다가앉은 ‘비행사’에게 쉼없이 들려준다. ‘비행사’는 그간 진정한 대화가 가능한 상대는 없다는 체념 속에서 살다가 ‘상상력’을 소실한 ‘어른’이었다. 하지만, 왕자와의 대화를 통해서 그 동안 잊고 지냈었던 가치들과 다시 마주하게 된다.  


비행사가 왕자로 인해 성장한다는 사실 만큼 아름다운 것도 없다. 그것은 희망의 다른 말이 된다. 이미 어른들의 세상은 터키식 전통복을 입었느냐, 유럽식 정장을 입었으냐로 진실을 판가름할 만큼 모순되어 있는 세상이다. 헌데, 수 천, 수만의 아이들이 그런 어른들처럼 자라나길 강요당하고 있는 가운데, 그 모순과 진실을 마주할 용기로운 어른이 등장하게 된다는 것은 자라나는 아이들의 상상력을 키워주고 유지시켜줄 어른이 나타났다는 말과 동일하게 된다.

 

실제 제품이 쓰여질 당시의 시대상은 그리 밝지가 못했었다. 세계 1, 2차 대전이 있었고, 전후의 도시들은 불안했으며, 상상력과 상대를 위한 배려 등은 먹고사는 문제로부터 그 우선순위가 훨씬 뒤쳐진 문제였었다. 지켜주고 안아주고, 내일을 위해 가꾸어줘야할 ‘아동’이라는 근대적 개념이 한창 만들어지던 시대였지, 그것이 지금처럼 완전히 모두에게 동일한 형태로 자리잡은 개념은 아니었던 시대였다.  


그런 시대 속에서 『어린왕자』는 탄생하였고, 작품 속 어린왕자는 현실밖 ‘비행사’들에게 자신의 짧았지만 긴 여행을 들려주며, 상대를 사랑한다는 것과 ‘길들이는 것’, ‘위해주는 것’, ‘눈에 보이지 않아도 분명 존재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고, 이 이야기는 시대와 공간을 넘어 지금에도 읽히고 있는 것이다.

 

 

 

소실된 상상력과 고립된 자아들

 

 

지금까지 동화『어린왕자』를 이루고 있는 단순한 도식, 심볼, 등장인물들간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여기서 잠시 ‘뱀’에 대해선 생략하였다. 사실 ‘뱀’도 대단히 강한 상징이며, ‘왕자의 성장’에도 없어서는 안될 비밀의 열쇠이기도 하다. 필자는 생텍쥐페리가 이미 ‘뱀’이 지닌 기존의 강력한 상징적 이미지를 잘 알고 있었고, 이 동화에서 아주 적절하게 사용한 것이라 보고 있다. 뱀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게 ‘죽음’을 왕자에게 선사한 인물이다. ‘죽음’이라는 수단을 통해 왕자의 ‘여행을 종결’지었으며, 여행의 종결은 즉 ‘성장의 완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처럼 ‘뱀’을 통해서 ‘죽음’을 언급한 것은 실제 뱀이 맹독을 지닌 탓이기도 하겠지만, 전체 문맥적으로 ‘우로보로스’적인 상징의 의미가 더 강력하다고 본다.)

실제 ‘말을 할 수 있는 인격체’임에도 불구하고, ‘소행성에 거주하고 있는 어른들’은 한결같이 어린왕자에겐 어떤 성장의 발판을 안겨다주지는 못한다. 그중 1분마다 점등을 끄고 켜는 인물에게서 왕자가 잠시 ‘성실함’의 일면을 엿보는 듯도 하지만, 이내 곧 발걸음을 돌리는 장면에서 볼 수 있듯이 ‘성실한 것과 무비판적으로 시키는 일에만 빠져있는 것’은 분명 다른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여기서 재미난 점이 작가 생텍쥐페리가 그런 어른들을 모두 ‘소행성’에 모아두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왕자 역시 그 고향별이 소행성이라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 일단 ‘소행성’을 배경으로 두고 있는 등장인물들은 모두 ‘외로운 사람’들이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왕자 역시도 별반 다르지가 않다.  


아침에 눈을 떠 세안을 하고, 활화산을 돌보고, 바오밥나무의 뿌리를 쳐내고, 장미에게 바람막이를 해준다고는 하지만, 왕자에게 있어 가장 즐거운 시간은 해가 지는 풍경을 가만히 앉아서 바라보는 것이다. 그 광경에 젖은 채로 있고 싶어서 의자로 몇 번이나 뒤로 물려가며 있었던 왕자지만, 이 행위는 혼자서 심취하는 행위이며, 혼자서 감성을 다독이는 행위이다.

 

저마다의 소행성에 있는 다른 어른들도 이 점은 다르지가 않다. 자칭 왕이라는 자의 소행성은 왕좌 외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별을 헤아리는 사업자의 행성도 커다란 테이블 외에는 없고, 술고래의 행성에도 술상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얼핏보면, 이해와 상상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환 제한적인 묘사같아 보일 수도 있지만, 다시 보면, 인물들이 소행성에 갇혀있는 외로운 군상으로 볼 수도 있는 부분이다.
  

왕은 왕자를 만나 말이 많아졌고, 사업가는 별을 다시 헤아려야 했지만, 왕자의 말에 대꾸해주었으며, 이는 점등을 켜는 인물 역시 동일하다. 이처럼 타인이 말걸어 주는 행위에 기본적으로 그들은 응해주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이것은 어른을 비롯한 어떤 인간들에게도(왕자와 같은 아이들은 물론이고) 대화의 여지가 남아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어른들은 서로간의 이해를 돕고, 실리를 위해 숫자에 집착하고, 감성보다는 보여지는 것, 당장에 보이는 것들에 매진하며 살지만, 그 덕분에 모두가 외롭다. 때문에 사실 모두가 대화의 여지를 남겨두고는 있지만, 스스로가 쌓아놓은 견고한 틀이 있어 쉽사리 대화가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반면, 왕자는 오히려 ‘비인격체’라 할지라도 애정을 주고, 서로 신뢰하는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대화를 통해서 한층 더 성장하게 되며, 이제는 자신을 위해 몸단장을 하는 장미에게로 돌아가 장미를 지키려고 한다.


이처럼 세상이 정해놓은 틀, 그 틀을 따라가며 자라나 어른이 되어 ‘상상력이 소실’되면, 덩달아 ‘외로움’이 찾아오게 되지만, 그때는 그걸 도무지 풀 길이 없어지는 것이 ‘현대사회의 어른’이다. 그들은 존재하지도 않는 대상으로부터도 권위를 인정받길 원하며, 주머니에 얼마가 쌓이든 만족을 모르고, 무엇 때문에 직업을 가졌는지, 그 근원적인 이유도 모른 채 일을 하고, 한 순간에 실수로 작은 것이라도 하나 잃게 되면, 술독에 빠져 헤어나오지도 못하는 불쌍한 군상들이다.

 

 

 

 

지금의 우리들은 상상력을 지키고 있는가?

 

오랜만에 읽었고, 오랜만에 읽은 만큼 그 여운도 길었던 『어린왕자』

  
책장을 덮으며, 지금의 우리들에 대해 생각해 본다. 어쩌면 우리는 생텍쥐페리가 『어린왕자』를 집필하던 시대의 어른들보다 훨씬 더 불운한 시절을 보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린 지금 당장 우리 앞에 놓인 수 많은 중요한 것들에게서 눈을 돌리고 스마트폰에 빠져있다. 그리고 우리의 아이들에게도 스마트폰을 건네고 있고, 그 사용을 막기는커녕 소비를 부축인다.
  

그 와중에 ‘상상력’을 잃어가고 있다. 상상력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하는 힘의 근원이다. 내가 아닌 다른 이의 입장을 그려보는 것. 그리워하는 것. 위해주기 위해 떠올려 보는 것… 이 모든 것들이 상상력에게서 비롯된다. 그것은 창의적인 것과는 또다른 것이며, 그보다 훨씬 기본적인 것이면서도 아름다움의 앞자리에 먼저 놓이게 되는 것이다.

  
모르겠다. 어쩌면 시대의 변화 속에서 우린 우리의 상상력을 얼마간 더 냉패겨쳐 버릴지도 모르고, 어떤 이는 또 그걸 기회로 삼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그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부디 적어도 나와 내가 아끼는 주변인들은 ‘서로를 위해 상상하는 법’을 잊어버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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