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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짜투리시간/도서 읽고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를 읽고 - 우리는 한 때 모두가 아동이었다.

글쓰는아빠 2021. 5. 31. 01:48

2018년 8월 5일 이전에 작성되었던 글입니다.

 


 

아마도 한국에서 가장 많이 읽힌 브라질 소설이 아닐까??

 

 

 

어릴 때 어린이 권장도서목록 중에 있었던 소설로 기억한다.
그리고 분명 내가 직접 읽었던 기억도 있다. 출판사가 어디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삽화도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나 내용은 조금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까맣게 잊고 있던 '제제'를 다시 떠올리게 된 건 순전히 아이유 덕분이었다. 
한 동안 실시간 검색어에 '아이유 제제 논란'이 오르락내리락 했었지만, 사실 거기에 대해선 별로 할 말이 없다. 연예계에서 흔히 일삼는 노이즈마케팅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어서 어떻게든 어그로를 끌고, 잇속을 챙기려는 무리들이야 언제나 있었지 않은가?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가꾸어가려면, 오히려 이런 문제들은 가볍게 모른 척 해주는 게 좋다고 본다.

 

 

 

제제가 5살이라서 스타킹을 신겨놓으면 안되고, 섹시하다란 말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한다. 나는 저게 말인지 방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문제는 상상력으로 차용하여 빚어낸 컨셉을 현실에 억지로 끼워맞추며 확대해석하려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뒤흔들어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려는 사람들에게 있다고 본다.

 

 

각설하고ㅡ.

나 역시도 그 논란 아닌 논란들을 접하게 되다 보니 자연스레 대체 내가 어린 시절에 무얼 읽었던 건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차에 다행히 대구문화공장에서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를 읽고 독서토론을 한다는 소문을 접하게 되었고, 기회 삼아서 부랴부랴 읽게 되었다.

 

 

 

우리는 한 때 모두가 '아동(兒童)'이었다.

 

 

부랴부랴 손에 들었지만,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결코 부랴부랴 읽을 수 있는 소설이 아니었다. 이게 어린이 권장도서? 청소년 권장도서라고? 정말, 대한민국 교육 따위 다 족구나 하라 그래!!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는 정확히 성인을 위한 소설이었다. 이걸 어린이가 보고, 사춘기 소년소녀가 읽는다고 해서 흔들리는 질풍노도의 시기에 가치관을 정립시켜준다거나 정서 함양에 큰 도움이 될 그런 소설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 큰 핵폭탄을 안게될 수도 있는 내용이었다. 그러니 어린 시절의 나 역시도 기억을 못하지! 

뭐, 그래도 그런 푸쉬-그 분류 기준이 몹시도 궁금한 권장도서 라는 홍보-덕에 아마 이 책은 아직까지 한국에서 가장 많이 읽힌 브라질 소설일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참 고마워해야할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아름다운 소설을 내가 살면서 접할 일이 있었을까? 

 

 

나의 어린 시절에도 나의 상상력이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었다..

 

 

소설 속 주인공 '제제'는 5살 밖에 되지 않은 아동이다. 말이 좋아 아동이지, 현재 우리나라로 치면 '유아'에 해당될 만큼 어린 아이다. 그러나 이 어린 아이를 둘러싼 세상은 조금도 호의적이지가 않다. 소설의 초반부부터 '제제'가 일방적으로 당해야 하는 '가난'에 대한 설명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 소설이 흥미롭고 재미있는 점은 가난에 대한 묘사에만 치중되지 않고, 그 환경 속에서도 유독 강한 개성을 보이며 자신만의 색깔을 드러내는 '제제'의 행동들을 클로즈업 하기 때문이다. 

제제는 집안 식구들에게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으면서도 끊임없이 장난을 저지른다. 그리고 저지른 짓을 감추기 위해 도망도 다녀보고 숨어도 본다. 놀라운 건 이런 악동적인 기질 외에도 제법 아주 영리한 구석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학교는커녕 주변인들 누구에게도 배우지 않고서 글을 읽을 줄 안다거나 나이 많은 어른들보다도 사람을 상대하며 장사하는 법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있다. 나이보다도 훨씬, 아주 영리한 장난꾸러기인 것이다. 

그러나 제제라는 인물은, 그리고 이 소설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가난하기 때문에 제제는 5살임에도 불구하고 크리스마스 선물조차 받질 못한다.
가난하기 때문에 제제는 5살임에도 불구하고 크리스마스에도 구두닦이가 되어 거리로 나선다.
가난하기 때문에 제제는 5살임에도 불구하고 부모형제가 있어도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지 못한다.
가난하기 때문에 제제는 5살임에도 불구하고 외로운 정서를 고작 상상력만으로 버티어 나간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제는 꼴랑 5살밖에 되지 않았으면서 자신보다도 더 가난한 같은 반 친구를 걱정하고,
제제는 꼴랑 5살밖에 되지 않았으면서 실직 상태로 힘이 빠져있는 아버지를 위로하려고 하고,
제제는 꼴랑 5살밖에 되지 않았으면서 못생겼단 이유로 꽃 한송이 받지 못하는 담임선생님을 위해주려 하고,
제제는 꼴랑 5살밖에 되지 않았으면서 자신보다도 어린 동생을 위해 늘 확실한 사실만을 알려주려고 한다.

이보다 입체적이고, 다양한 면모를 지닌 희대의 주인공이 또 있었던가??

(작가가 외치고 있지 않은가? 아동 역시 어른들 만큼이나 복잡미묘한 인격체라 오감을 다 누리는 존재라고!!!)

 

 


오직 자신의 상상으로 마음을 어루만져야만 했었던 어린 영혼... 제제.

 

 

소설 속에서 묘사되고 있는 제제와 그 식구들의 가난은 사실 당시 브라질 사회 전반을 짓누르고 있는 분위기였었다. '아동'이 우리에게 언제부터 '아동'이었던가? 먹고 사는 문제 자체가 힘든 시절에는 미취학 아동에게조차 노동력을 기대했던 것이 인간의 역사다. 온전하지는 못하더라도 자기 입에 들어갈 밥값 정도는 해주길 바라는 마음. 그 마음 자체가 사악하다기 보단 그러지 않고서는 생존을 위협받았던 시간들이 있었다. 문제는 소설의 배경이 되었던 당시의 브라질은 현대적 '아동'의 개념이 이제 막 뿌리를 내리던 시점이었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당시의 남미 대륙 역시 빈부격차로 인해 한쪽은 '아동'으로의 특권과 혜택을 받았다면, 다른 쪽은 여전히 산업혁명 이전의 아이들처럼 헐벗은 채로 세상에 맞서야 하는 상태였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은 78 페이지의 묘사를 통해 쉽게 유추할 수 있다.

 

 

내가 구둣솔로 통을 두드리자 그는 발을 바꿨다. 나는 아까와 마찬가지 방법으로 다른 쪽을 마저 닦았다. 그리고 양쪽 구두에 모두 광을 냈다. 구두를 다 닦고 난 뒤 통을 두드리자 그는 발을 내려놓았다.

 

 

묘사를 보면, 이미 몇 차례나 구두닦이를 해본 솜씨다. 제제는 고작 5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거리로 나와 돈벌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뿐인가? 그런 제제에게 구두를 맡겼던 어른들이 있었기에 저 일련의 작업들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시대를 살다보니 제제의 가족들은 제제의 장난들을 용인할 수가 없다. 장난을 친다는 것은 조금도 돈이 되지 않는 행위다. 단순히 돈이 되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제제가 장난을 칠수록 어른들은, 가족들은 손해만 보게 된다. 주변에 변상을 해주는 것은 둘째치더라도 사건을 무마시키는 과정에서 일에 지친 어른들이 파김치가 되는 것은 물론이고, 그 일련의 과정 덕에 일을 손에서 놓아야 한다는 사실이 부담이 되고, 스트레스가 된다. 

덕분에 고작 5살밖에 되지 않은 이 악동은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고 소외당하게 된다. 그나마 가족을 도울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행동은 나이를 속여서라도 학교를 다녀 일과시간 중에나마 어른들의 신경을 덜 쓰이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제제는 본인의 의지나 마음 등을 배려받지 못한 채 불가피한 어른들의 사정과 편의에 의해 행동의 제약을 받게 된다. 

어른들의 통제로 활력을 잃은 제제가 마음을 여는 유일한 창구는 제제 스스로를 대할 때 뿐이다. 라임오렌지나무로 상징되는 제제의 상상력은 늘 제제에게 안락함을 제공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상상력을 발휘하는 당사자가 제제다. 제제 본인의 정서적 안녕을 위해 라임오렌지나무는 이름을 가지게 되고, 말을 하게 되고, 길을 안내하며, 인디언들을 불러내기도 한다. 

외부로부터 상처받지 않기 위해 내면으로의 여행에 집착하는 것이다.

이것이 비단 '제제'만의 문제인가? 사실 지금 이 시각에도 불가피한 어른들의 사정으로 인해 많은 '아동'들이 행동의 제약을 받고 있다. 모순적인 건 그런 제약을 가하고 있는 어른들 역시 한 때는 모두가 '아동'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우리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다시 한 번 제제를 보도록 하자. 많은 것들이 우리의 올곧은 성장들을 방해했지만, 우리 역시 제제처럼 나보다 누군가를 위해 마음을 내어주는 법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순수한 아이들이었지 않은가?

 

 

나는 구두닦이 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통을 바닥에 내려놓고 주머니에서 포장된 담배를 꺼냈다.
"아빠, 이것 보세요. 아빠 드리려고 아주 좋은 걸 샀어요." (p.87)

"가끔 선생님께선 생크림 빵을 사라고 저한테 돈을 주셨잖아요. 그렇지요?"
"매일 주고 싶어도 네가 종종 사라져 버렸어."
"전 매일 받을 수가 없었어요."
"왜?"
"간식을 가져오지 못하는 다른 애들이 있으니까요."(p.116)

 

 


 

 

대화의 단절이 부른 폭력. 어른은 항상 어른의 눈높이에서 아이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해석하려고 한다.

 

 

지금까지 내가 갈겨쓴 내용들은 대부분 책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내용들이다.
소설은 후반부에 이르러 아버지의 폭력과 뽀르뚜까 아저씨의 사랑을 크로스 시키며 제제로 하여금 원치 않는 성장을 촉진시킨다. 

아- 
사실 소설의 모든 아름다운 내용들은 글의 말미에 이르를 수록 더욱 완연하게 익어가기 마련이다.
그만큼 읽는 이로 하여금 많은 의문을 머금게 하기도 한다.

과연 
제제가 마음을 열었던 상대는 뽀르뚜까 아저씨 뿐이었을까?
제제에게 그럼 동생과 누나는 어떤 존재였을까?
아니, 가족들과의 화해는 있었을까?

그보다 아버지의 복직으로 경제활동이 정상화 된 제제의 가족들은 어떤 변화를 보였을까?
가사를 돌보지 못했던 어머니는 제제의 눈높이를 맞춰줄 수 있을까?
아니, 제제의 라임오렌지 나무 밍기뉴는 제제의 마음 속에서도 베어졌을까?


그러나 이 책은 그런 많은 물음들을 뒤로 하고,
말미에 이르러 성인이 된 제제가 뽀르뚜까 아저씨에게 편지를 쓰는 것으로 마지막 장을 대신할 뿐이다.




.
..
...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권하는 바이다.
이 책을 읽어보시길.
그리고 제제처럼 상상력에 기대어 흘려보냈던 유년기로 돌아가 그때 억압받아 상처받았던 스스로의 내면에게 키스해주길. 나아가 우리 사회의 아동들을 위해 그때의 눈높이를 견지하고 세상을 둘러볼 수 있길...

 

 


 

 

자꾸 오래 전에 써뒀던 글만 한 동안 퍼왔네요.

그만큼 살짝 일이 밀렸네요.

 

조만간 직접 새로 쓴 포스팅으로 돌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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