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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삼관 매혈기 -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 그 자세에 대해.

글쓰는아빠 2021. 7. 30. 09:14

위화의 소설은 기본적으로 재미있다. 소설가에게 그보다 더한 명예가 또 있으려나? 재밌는 소설을 쓰는 소설가, 위화. 그의 소설만큼이나 참 솔직하고 담백한 평이 아닐 수 없겠다. 그래서 구구절절 쓰려니 오히려 좀 실례되는 기분마저 들 정도다.

 

 

동명의 영화도 있지만, 관람은 권하지 않는다.

 

 

일단 허삼관 매혈기의 가장 큰 장점은 국내 번역이 너무 잘 되어서 솔직히 중국소설이 아니라 한국소설이라고 하더라도 믿을 수 있을 정도다. 

(물론, 이런저런 큰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두고 있다는 점에서 어쩔 수 없기도 하지만... 그만큼 기본적인 서술과 묘사, 해학적인 부분들에 대한 번역이 탁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 남자의 인생, 나아가 한 가족의 일생을 다룬다는 점에서도 감동의 폭이 매우 크다. 다시 말해, 전체 소설 진행에 있어서 걸음을 멈추고 곱씹어 볼만한 부분들이 매우 많다는 것이다. 

 


 

 

우선 필자가 가장 흥미롭게 여기는 부분은 '일락'이란 존재다. 허삼관과 그의 부인 허옥란의 장남이지만, 허삼관의 아들은 아니며, 허옥란의 아들인 일락. 일락이는 허삼관과 그의 부인 허옥란이 결혼하기 직전에 허옥란이 하소용이란 인물과 관계를 가져 생긴 아이다. 그러니 생물학적으로 허삼관의 아들은 아니다. 

이 이야기의 본격적인 시작은 허삼관이 그런 사실을 알게 된 이후부터다. 아내의 혼외정사로 생긴 아이를 정말 내 집안의 맏이로, 가문의 장남으로 인정할 것인가? 소설은 이에 대한 이야기로 절반 이상을 채우다시피한다. 동명의 제목으로 영화화된 하정우 감독의 '허삼관 매혈기' 역시 이 사건을 메인 에피소드로 두고 있다. 

재미있는 건 일락이의 아버지 찾기가 소설에서 많은 부분을 할애하기는 하더라도 그게 이 소설의 전부는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전반적인 장치로, 일락이는 소설의 발단과 전개를 책임지며, 최후 절정과 위기에 이르기까지 작가에 의해 알뜰하게 써먹히지만, 일락이는 어디까지나 조연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허삼관이다. 그의 매혈기다.

 

 

 


 

 

허삼관이 최초로 피를 뽑은 경험은 어디까지나 호기심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소설 속에서 피를 팔아서 번 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고민했었다는 걸 보여줬다는 점에서 이 행위는 허삼관의 성년식과도 같겠다. 다시 말해, 그 이전에도 이미 직업은 있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드디어 피를 팔았기 때문에 사회구성원으로의 통과의례를 마친 격이다. 허삼관이 스스로 번 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고민했다는 점, 그리고 스스로의 선택으로 돈을 사용하게 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허삼관은 그 돈을 이용해 허옥란에게 장가를 간다. 

건강한 사회구성원이 되어 장가까지 가게 된 허삼관은 그 이후부터는 함부로 피를 뽑지 않는다. 그가 피를 뽑는 순간은 어디까지나 가족들을 위해서다. 가족들의 생존과 생활 영위를 위해서만이다. 여기서부터 그 순간을 짚어보자면,

1. 일락이가 사고를 쳐서 뒷수습하는 비용을 위해.
2. 가뭄으로 인해 가족들이 겪고 있는 극단의 허기를 극복하기 위해.
3. 이락이의 출세를 위해.
4. 일락이의 치료비, 생존을 위해.

이처럼 모두 가족들을 위해서다. 가부장 사회니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허삼관과 허옥란의 관계를 보고 있자면, 허삼관이 그리 훌륭한 아버지라 하기에는 힘든 게 사실이다. 허삼관이 기본적으로 벌이가 좋지 못했으며, 사실 피를 판다는 어떤 선택지가 따로 없었다면, 진작 풍비박살이 났어도 났을 집안이다. 오히려 어떤 억척스러움과 절약 정신, 가계를 꾸려나가는 생활력에 있어서는 허옥란이 한 수 위인 부분이 크다. 

덕분에 허삼관이 피를 파는 행위는 굉장히 신성하기까지 하다. 가진 것 없는 자의 최후의 보루. 그걸 서슴없이 내던지는 허삼관은 가장으로의 존엄을 획득함과 동시에 소모된다. 덕분에 그의 가족애와 부성애는 절로 눈시울이 붉어질 정도이지만, 작가 위화는 그럴 겨를을 쉽게 주지 않는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 유머를 수 놓고, 문단과 문단 사이에 해학을 삽입해 독자들의 혼을 빼놓는다. 

그래서일까? 실제 피를 팔지 않는 순간들에 대한 이야기가 제법 방대하며, 거기서 당연 일락이의 비중이 눈에 뛸 정도로 커짐에도 이야기의 밸런스가 무너진다는 위화감이 없다. 왜냐하면,

 

 

그런 가족들간의 관계 자체가 인생의 한 굴곡일 뿐인 것이다.

 

 

허삼관은 아내 허옥란과 싸웠다가 용서했고, 나아가 자식들로부터 지켜줬으며, 피가 섞이지 않은 일락이의 존재를 재발견 하고, 다시 진심으로 자신의 아들로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소설가 위화는 주인공의 이런 극단의 감정적 변화를 어떤 일말의 위화감도 없이 대단히 그럴싸 하게, 아주 재미나게, 독자에게 전달한 것이다. 

헌데, 정말 우리의 인생이 그렇지 않은가? 희노애락의 연속이며, 사람들과의 관계의 연속이며, 선택의 연속이다. 허삼관은 그런 연속성 속에서 위기가 올때마다 피를 팔았고, 선택의 순간마다 당연하다는 듯이 가족을 선택했다. 마치 우리들의 아버지들처럼 말이다. 



 

그러니 이 소설은 어쩌면 평범했던 한 남자가 아버지가 되어가는 성장소설처럼 읽히기도 한다. 헌데, 감히 '성장소설'이다 라고 가볍게 말할 수 없는 것이 노인이 된 허삼관이 등장하면서, 성장한 아버지들은 그럼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사실은 너무 뻔한 물음 앞에서 말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드디어 자식들을 다 장성시키고 노년을 맞이한 허삼관은 이제 추억만이 전재산이다. 정말 먹고 싶어서 돼지볶음간을 사먹으려고 했다기 보단 피를 뽑아 자신의 값어치를 증명할 수 있었던 시절. 그리고 그 시절에 만났던 사람들과 그 순간에 대한 회상 덕에 돼지볶음간이 당겼으리라...

허삼관은 이제야 겨우 오롯이 자신만을 위해 피를 뽑아보려 하지만, 이제 나이가 먹어 노인이 되었단 이유로 문전박대를 당하게 된다. 쓸모가 없어진 거다. 더는 건강한 사회구성원이 아니라 그저 노인일 뿐이다. 그런 그를 허옥란이 위로한다. 자식들이 모두 장성하였고, 이제 집안에는 돈이 있다고 한다. 헌데, 그 돈이 정말 허삼관의 돈인가? 아들들의 돈이고, 아내가 살뜰히 그것을 불린 돈이다. 허삼관이 건강한 사회구성원으로 기능하여 벌어들인 정상적인 수입이 아니다. 

이 마지막장에서 작가 위화는 허삼관과 함께 독자들을 다시 과거로 한 번 이끌고 다닌다. 독자들은 쉬지 않고 달려온 삼백여 페이지를 다시 잠시나마 되감아 보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에 이르러 작가는, 허삼관은, 그렇게 굴곡을 넘어온 인생의 끝자락에서 얻은 생의 진리, 인생을 대하는 자신만의 태도에 대해 밝히게 된다. 

 

 

 

그런 걸 두고 좆 털이 눈썹보다 나기는 늦게 나도 자라기는 길게 자란다고 하는 거라구.

 

 

엇나가 있는 듯 하고, 불공평해 보이고, 희비가 늘상 교차하여 그것이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 해도 괜찮다. 괜찮은 것이다. 

무능력해도 피를 팔아서 인생의 위기를 수습할 수 있었던 허삼관. 내 피가 섞이지 않은 자식을 위해서도, 내 피를 섞인 자식을 위해서도 피를 팔았던 허삼관. 그래서 아버지가 아버지가 아니었음에도 아버지의 은혜를 입은 일락이와 아버지가 자신을 돕는지도 모른 채 있었던 이락이.

모두가 다 자기 몫의 인생을 '공평하게' 살아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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