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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일 마당깊은 집을 읽고 - 전쟁이 앗아간 것들에 대하여

글쓰는아빠 2021. 8. 2. 16:42

김원일 마당깊은 집을 읽고

전쟁이 앗아간 것들에 대하여

 

작년 12월말쯤.

대학시절의 은사이신 교수님을 뵈었을 때,

김원일의 마당깊은 집에 대해서 듣게 되었다.

분명 대학 3, 4학년 때쯤 그 분의 수업을 듣기 위해서 읽었던 기억이 있었는데,

막상 떠올려보려니 상이군인의 갈고리손 외에는 전혀 기억나는 이미지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야무지게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고맙게도 문화공장에서 독토를 진행할 거란 소식이 들려 곧장 읽어버렸다.

 

 


 

 

 

다행히 많이 읽힌 책이다.

이제는 종영이 되었지만, MBC느낌표 라는 TV프로그램이 있었다.

거기에서 선정도서로 선정된 덕택에

80년대 이후 탄생한 것치곤

다행히도 많은 사람들에게 많이 읽힌 몇 안되는 한국현대문학소설이다.

 

(소설의 배경을 이해시켜주기 위해

이미지를 첨부해드리고 싶지만,

6.25 전후의 대구를 찍은 사진을 제가 무단으로 배포할 수는 없으므로,

우연히 검색을 통해 알게된 블로그 링크를 남겨드립니다.)

http://blog.naver.com/pil8080/120161716007

 

 

김원일 작가의 소설 마당깊은 집의 배경은

6.25 전후, 대구 약전골목의 '마당이 깊은 집'이다.

 

지금으로 치면,

주인댁 본채와 불법가건축물로 확장시킨 아래채 다가구 셋방살이 식구들의 이야기다.

 

이미 공간적으로도 주인댁과 셋방 사람들로 나뉘어져 있지만,

이 물리적 공간은 상징적으로 자본가와 노동자 계층으로도 볼 수 있으며,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그 시대에 존재했었던 다양한 인간 군상들로 이루어져 있어

소설 마당깊은집의 이야기는 등장인물들만으로도 제법 풍성하게 짜여진다.

 

게다가 이야기의 중심은

김원일 본인의 자전적인 면이 강하게 녹아있는 주인공 길남이가 있어

이제는 전후시절을 겪었던 어른,

당시에는 성장하는 사춘기 소년이었던

화자 길남이의 눈과 일을 빌려 적절한 거리감을 유지하며,

당시의 시대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었으며, 어떤 흐름으로 흘러갔는지에 대해

세밀하면서도 노골적이지 않은 태도로 담담하게 서술된다.

 


 

1. 6.25 전후의 시대상

 

 

1950. 대한민국에서 6.25 전쟁이 발발했다. 그리고 모든 전쟁들이 그렇듯이 대한민국 역시 참으로 많은 것들을 잃게 된다. 당장 수 많은 생명들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살아남은 생명들은 물리적, 정서적 고향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 뿐인가? 일제 식민통치 이후, 겨우 자발적으로 다시 다잡아가던 개개인의 경제적 기반 역시 사라졌고, 얼마남아 있던 않았던 고유의 문화재들도 유실되었다. 난리통에 당장 산이 헐벗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일반 서민들은 생필품이며, 옷가지조차 성한 것이 없었다.

 

헌데, 이런 전쟁이 왜 일어났었던 전쟁인가?

표면적으로는 남북으로 세력이 나뉠만큼 이념이 극단화 되어 일어난 비극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일제의 식민통치 이후 세계전 패권을 다투던 강대국들의 실험적 씨름장으로 쓰인 곳이 한반도였다. 당연히 한반도의 지배권력층들도 선택권이 제한적이었으니 일반 시민들은 그저 당해야만 하는 전쟁이었다.

 

그럼, 전쟁 후의 삶은 원만했는가?

휴전 이후 남한은 자유민주주의 독립국가가 되었고, 전쟁발발의 위협으로부터 미국의 보호를 받으며, 점진적으로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구축해갔었다. 그러니 어쩌면 순리대로 전후처리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역시도 표면적인 것일 뿐, 실상은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정상적인 안착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이승만 정권의 장기집권이 자행되었고, 여전히 남한에 남은 친일세력들은 그 부를 증식시켜나갔다.

 

한반도에서는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난리통이었지만, 전후처리는 철저히 기득권층에 의해서 진행되며, 대다수의 서민들은 여전히 가난을 벗어날 길이 없었다.

 

 

 

2. 아버지들의 부재

 

 

전쟁이 앗아간 것들 중에는 그 시대의 아버지들도 있다. 이 같은 아버지들의 부재는 김원일의 마당깊은집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아버지가 부재중인 가정은 주인공 길남이의 집만이 아니다. 옆집 준호네 아버지도 전쟁 덕에 팔 한쪽을 잃었고, 가정에서 정상적인 가장의 기능을 수행해내지 못한다. 이웃한 경기댁과 평양댁도 남편이 없다. 각자 배경이야 조금씩 다르지만, 아래채 셋방식구들 전부 정상적으로 가정의 가장 역할을 하는 남자가 없다. 가장의 역할을 대행해야 하는 어머니들, 혹은 그 아들들만이 있을 뿐이다. 덕분에 아래채 식구들의 가계형편도 눈여겨보면 재미난 점이 있다.

 

먼저 주인공 길남이네는 아버지가 없고, 길남이 역시 어리다. 덕분에 아래채 사람들 중 가장 곤혹스럽다. 악착같이 살아간다고는 하지만, 어머님의 노동력은 바느질 정도가 전부였고, 아직 중학교에도 들어가지 못한 길남이는 신문배달이 할 수 있는 전부다. 강제적으로 아버지의 역할을 대행해야 하는 건 당장 어머니지만, 어머니는 언제든 이 역할을 장남인 길남이에게 떠넘기려고 벼르고 있다. 여기서 길남이와 어머니 사이에서 갈등이 빚어지는 건 자연스런 전개이지만, 동시에 이들이 부를 축적하지 못하고 오랜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전개가 되겠다.

 

옆집 준호네는 조금 다른 경우다. 준호네 아버지는 생물학적으로 남성으로 살아있지만, 지뢰 덕분에 팔 한 쪽이 없는 불구자다. 퇴역한 상이군인이라는 그의 신분은 사회적으로 불리할 뿐이다. 준호 아버지는 준호 어머니보다도 사회적 경쟁력이 부족하다. 덕분에 준호 어머니는 아기를 낳고서도 몸조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다시 생활전선으로 뛰어들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준호 아버지는 사회적으로 성숙한 성장을 이미 마친 남성이라는 점이다. 이 사실은 확실히 길남이네 보단 유리한 입장으로 작용하게 된다. 여기서 유리한 입장이란 것은 월수익이 길남이네 보다 준호네가 더 많다거나 하는 부분이 아니다. 바로 가족구성원들간의 의지와 담합의 과정에서 시행착오가 없다는 점이다.

 

그 옆에 살고 있는 평양댁 식구들은 또다른 입장에 있다. 일단 여성인 평양댁이 아버지역할을 대행한다는 점에서는 길남이네와 같은 입장이다. 그러나 장남에 대한 기대치와 역할에 대해선 또 다르다. 길남이는 미성년자임에도 하루 빨리 성숙한 가장이 되기를 강요받지만, 폐병을 앓고 있는 정태씨는 가장의 역할을 기대받지 않는다. 그것보단 단순히 건강하게 생존해줄 것을 요구받는다. 그렇다고 해서 차남인 민이가 그 역할을 압박받지도 않는다. 길남이보다 성숙하고 공부를 많이 한 민이는 주인채 아들들의 가정교사도 하며 충분히 자기몫의 일을 하고 있다. 그러니 어쩌면 자신의 몫 이상을 하고 있는 평양댁과 차남 민이의 역할로 굳이 형식적으로나 물리적으로 '가장'이라 불릴 남자가 따로 더 필요하지는 않은 가정이다.

 

끝으로 경기댁이 남는데, 사실 이 가정이 가장 미스테리한 가정이다. 길남이네, 평양댁처럼 아버지가 부재중인 가정임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그 역할을 대행하지는 않는다. 그녀는 엄연한 백수다. 일단 경기댁은 고등교육을 받은 것으로 묘사되지만, 그 학력을 가지고 벌이에 이용하지는 않는다. 가계는 치과 기공사로 일하는 장남과 미군PX에서 일하는 차녀의 수익으로 유지된다는 점에서 납득이 되지만, 그들의 성장까지는 쉽지 않았을 텐데, 그녀는 시종일관 손에 물 한 번 안묻히려는 게으름을 보인다. (작품 중반에 이르러서야 확인되지 않은 풍문으로 그녀가 북쪽의 유지 아무개의 처첩이었다는 정보가 짧게 지나치지만, 그렇다고 해서 피난생활을 안착하기 이전에 치기공인 장남이 무난히 정상적으로 성장했었을지에 대해선 의문이다.)

 

이처럼 네 식구 모두 아버지, 가장은 물리적으로도, 기능적으로도 부재중이지만, 가계수익구조에 따라 그 부재가 얼만큼 잔혹하게 이들을 괴롭히느냐는 조금씩 다르다. 네 식구 모두 장마철에 물난리를 겪을 만큼 없이 살아가는 모습은 똑같지만, 그 속에서도 생계의 무게감은 또 조금식 다 다르다는 것이다.

 

 

3. 분단, 재단된 상상력

 

 

작품 속에서 주인공 길남이 못지 않게 극의 카타르시스를 주는 존재가 있다. 바로 폐병을 앓고 있는 정태다. 정태는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과는 달리 정착하려하지 않는다. 다른 인물들이 휴전선 아래로 피난 내려와 발 딛고 있는 곳을 삶의 터전으로 만들려고 한다면, 정태는 터전이 되어야 할 공간이 총체적인 사회적 문제로 터전이 되기엔 부적합하다고 단정을 지은 인물이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기형적으로 한반도에 정착하려는 식민자본주의와 그 욕망에 편승하려는 사람들에게 질려 있는 인물이다. 그리고 정태와 같은 인물들은 실제 당시 한반도 곳곳에 있었던 인물이며, 형태가 조금 달라졌을 뿐. 여전히 이 남한 땅에는 긍정적인 형태의 사회주의체제를 열망하고 있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정태는 바로 그런 사람들을 대변하는 인물 군상이라 볼 수 있겠다.

 

 

한반도의 사회주의 운동은 사실 일제식민시대부터 있었던 자주적인 이념들 중 하나라 볼 수 있다. 당시 일제의 식민정책으로 그들의 체제, 그들의 시스템 대로 개편되다 보니 사실상 한반도는 일제에게 경제적 잉여이득을 모두 몰아주는 입장이었고, 일본의 이주자들과 소위 친일세력만이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이렇다보니 독립운동의 전개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사회주의 운동이었다. 문자 그대로 식민자본주의를 허물어트리는 아나키스트를 시작으로 모든 지배계급을 몰아내고, 인민해방을 통해 자주적 독립을 성취하자는 취지였다.

 

물론, 실상은 그런 이상적인 생각들은 조금도 빛을 보지 못했다. 오랜 시간 투쟁을 이어온 독립운동가들에겐 유감럽지만, 결국 그들의 실력행사로 이룬 독립부터가 아니었고, 하루 아침에 무정부주의 상태가 된 우리의 한반도는 강대국들에게 그저 좋은 먹이가 되었을 뿐.

 

사실 이 땅의 이념충돌은 우리들의 자의적 선택이 아니었다. 사실상 6.25는 김정일 개인이 개또라이라서 전쟁이 터졌다기 보단 당시의 구소련 체제와 미국의 무력 충돌이었다. 중국이 중도에 끼여들었던 이유도 사회주의 이념의 승리보단 장기적인 전망 아래에서 미국의 기를 꺾은 것에 불과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미군들이 대체 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답시고 이 낯선 한반도에서 죽어갔으며, 중공군들은 왜 백두산을 넘었고, 소련은 왜 무기를 밀어줬겠는가? 다들 허울이 좋을 뿐. 결국엔 이 한반도를 그들의 지리적 요충지로 삼으며, 동시에 그들의 경제속국으로 만들 생각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문제는 덕분에 여전히 우리 사회는 '빨갱이', '좌익', '공산당'이 하나의 카테고리로 분류될 만큼 기형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다. 전쟁의 시작은 우리들의 의지가 아니었어도, 전후처리조차 우리에게 선택권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안착화 과정에서 권력에 기대어 자신들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하려했던 사람들의 선택은 분명 기존 한반도의 원주민이었던 우리들의 선택으로 빚어진 결과다. 덕분에 우리들은 주변 강국들의 의도대로 이북은 공산주의 체제가 자리잡았고, 이남은 자본주의 체제가 자리잡았다. 둘다 아주 기형적인 형태로 말이다.

 

 

그런 배경이 있다보니 젊은 식자층들 사이에선 남한의 자본주의에 대해 불만을 품은 세력이 종종 있을 수밖에 없었다. 민주주의는 정상적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사사오입처럼 비정상적인 형태로 독재가 연장되고 있었고, 시민들도 슬슬 돈에만 혈안이 되어서 자기 재산 챙기기에만 바빠지고 있었다. 현실비판적인 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시의 시대가 잘못 굴러가고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다만 안타깝게도 그렇다고 해서 월북을 시도했다는 것은 아무리봐도 너무 안일하게 현실을 인식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점이다.

 

실상 한반도에 휴전선이 그어진 순간부터 일반인들은 휴전선 반대편의 존재들을 '상상'으로만 그려내야 했다. 아무도 그곳을 '직접'보지는 못했다. 어디까지나 첩보로 만들어지거나 정치적으로 그려진 '풍문'으로만 '상상'해야 하는 곳이었다. 그런 면에서 정태는 대단히 순진한 인물임에 틀림이 없다. 남한의 현실에 개탄하고 찾아간 곳이 휴전선 이북이라고 하니 이 얼마나 순진한가? 물론, 이북의 실상에 대해서 얼마간 신랄한 비판을 가할 수 있게된 것도 지금의 우리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 당시에는 모든 정보가 풍문에 지나지 않았을 테니 정태 같은 인물들도 그저 자신들의 '상상'대로 북한이란 공간이 다소 얼마간 관용적인 형태의 나라이길 막연히 바란 것일지도 모르리라.

 

 

이처럼 한반도에 휴전선이 그어진 그 시점부터 우리들은 '''상상'해야 했다. 그리고 그 적이 때로는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따라 휴전선 안쪽에 자리잡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정태에게는 기형적인 형태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자본주의와 그 추종자들이 적이었고, 어떻게든 정착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겐 휴전선 이북에서 전쟁을 주도한 세력들이 적이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휴전선 이남에서 생활하고 있는 정태가 불합리한 현실에 대해 다소 관념적으로 상상한 부분도 있다는 것이었고, 남한의 기득권 세력들이 원했던 것처럼 이북을 상상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작가 김원일은 이처럼 혼란스러웠던 시대상을 정태라는 인물, 그 장치를 통해 그려내면서 동시에 소설 전반에 이르는 긴장감도 주고 있다.

 

 

 


 

 

비단 전쟁이 앗아간 것들이 이뿐이겠는가?

 

소설의 전반에 드러나고 있는 아버지들의 부재와 재단된 상상력 외에도 사람들이 잃어버린 많은 것들이 이야기의 진행 속에서 툭툭툭 튀어나온다.

 

경기댁의 차녀 미선이는 신분적 상승을 위해서 미군 장교를 만난다. 이미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여성들은 사랑하는 법 따위는 잊었고, 살아남는 법을 본능적으로 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치기공을 하는 장남에게서도 드러난다. 그의 결혼은 대구의 유지 중 한 명의 딸과 이어진다.

 

상이군인이 된 준호아버지는 실상 급진적으로 발달하는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는 찬밥이면서도 그 목숨은 정치판에서 표 하나로 직결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길남이의 동생은 길남이의 표현대로 전쟁통에 걸린 영양실조 덕에 앓기만 앓다가 목숨이 날아갔다.

 

이들 아래채 셋방식구들이 가난 속에서 찌들어가며, 고향을 빼앗기고, 남편과 아버지, 동생을 빼앗기고, 인간으로써 남은 감성들마저 금전적인 가치로 환원을 하고 있을 때, 주인집 식구들은 또다른 품위를 잃어갔다. 장마철 물난리 속에서도 자기네 재산과는 관계가 없다며 강건너 불구경하듯이 하는 건 기본이고, 아들과 딸들도 연애질이 최우선이었고, 심지어는 집안의 며느리마저 춤바람이 난다. 유일하게 시대를 잘 만난 덕에 재산은 나날이 불어났지만, 그들 가족의 모습은 현시대에 우리가 앓고 있는 병환과 가장 유사한 형태다.

 

 

 

김원일의 마당깊은 집은 이처럼 시대를 관통한다. 정확히 전쟁 이후, 우리네 어머니들이 살아온 시절을 생생하게 그려냈으며, 거기에 더해 전쟁이 우리들로부터 앗아간 것들에 대해 생각할 많은 꺼리들을 제공해 주고 있는 훌륭한 문학작품임에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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