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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의 처녀작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

글쓰는아빠 2021. 8. 6. 11:10

 

(현재까지 포스팅된 책 포스팅들은 2015년부터 2018년쯤 사이에 타 사이트 블로그에 직접 먼저 게시했었던 글을 보관하기 위해서 다시 퍼온 겁니다.)

 

 

이제는 절판되어 구할 수도 없는 김연수의 처녀작. 도서관에서 책을 대여해서 제본을 떴다. 이런 걸 팬심으로 불러야 하나, 집착이라 해야하나...

 

연휴 덕에 드디어 벼르던 책을 읽었다.

정말이지 잘 읽히지 않았던 책.
김연수의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

솔직히 무진장 재밌기는 했지만,
의도적으로 문단을 나누지 않은 그의 문장 덕에 앉은 자리에서 
한 번에 읽어내기가 쉬운 게 아니었다.

덕분에 지난 한 해 동안 몇 차례나 벼르기만 하다가
이번 연휴에 비로소 결말을 본 것이다.

 

 


 

김연수의 최근작과 그의 처녀작은 여러 면에서 차이를 보인다.
우선 그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크게 다른 내용이 아니더라도
기본적인 이야기 전개 방식이나 문체, 등장인물들의 입체감, 구성 등에서는 큰 차이를 보인다.

아무래도 처녀작은 최근작들에 비해 전반적으로 샤프한 스타일이다.
문체도 딱딱한 편이고, 문장 역시 의도적으로 배열한 덕택에 함부로 쉽게 읽어서도 안된다.
(개인적인 생각으론 이런 문장 배열로 얻고자 했던 효과는 
 시공간의 동일성과 연속성을 획득하고자 해서가 아닐까 한다. 그리고 충분히 효과적이었다고 본다.)

흥미로운 점은 
그러면서도 주제, 메시지는 상당히 투박하게 던지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작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핵심은 이야기의 발단 부분에서 모두 나왔다고 봐야 한다.


주인공 최민식의 입을 빌려 
'개인의 퍼스낼리티는 사실 다양한 가면의 총집합'이라고 이야기 하고,
거기에 개념을 더 확장시켜 
'집단, 사회의 거대 퍼스낼리티 역시 한 조각의 가면'으로 볼 수 있으며, 
'그 가면 조각을 개인이 자의적으로 쓰는 경우'는
어떤 이유에서건 용납되어서는 안될 경우라고 못을 박는다. 

그리고 실제 최민식은 이 주장을 이야기의 마지막까지 굽히지 않고 관철시키며,
어떤 선의지를 가지고 그려냈다 하더라도 '전체주의'는 그릇된 것이다 라고 확언하게 된다.



이 소설이 재미난 점은 의외성에 있다.
얼핏 전반적인 문체가 현학적이고 철학적으로 보여 대단히 어렵게 느껴질 수가 있는데,
천천히 읽어보면, 실소를 흘릴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조크와
이야기의 전개를 쉽게 예측할 수 있는 단조로운 플롯으로 짜여있다.

(물론, '기관'으로 대변되는 각 조직들의 이념이나 주창하는 바가 너무 어렵게만 느껴진다면,
  한국현대사를 다시 공부하고 읽어보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 소설이 재미있는 점은 잘 모르고 읽어도 읽히는 맛이 있다는 점이다.
  작가가 진짜와 가짜, 현실과 허구의 세계, 등장인물들간의 이해관계 등을 
  자꾸만 모호하게  그려내려고 하지만, 
  그보다는 소소한 농담들이 먼저 터지게 되고, 모호한 중압감은 오히려 다음 순간에 
  더 큰 탄성으로 이완되어 독자들로 하여금 결말로 이르는 상상의 길을 
  조금 더 쉽게 그려낼 수 있게 만들어준다.)

덕분에 소설은 술래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쫓아다녀야 하는 숨바꼭질이 아니라,
누구의 장난으로 시작된 게임인지 뻔히 알면서도
정작 게임을 시작하자고 장난질을 한 녀석의 속내가 점점 궁금해지는 쪽으로 진행이 된다.

 


 

비단 1970년대생의 고민만 이런 것이 아니다. 81년생인 나도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

 

 

작가의 말에서도 따로 밝히고 있지만,
김연수는 본인 스스로 화두가 없는 세대의 곤욕스러움에 대해
아니, 정확히는 명확한 화두가 없는 시대에 
과연 그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문학인이 무엇을 말해야 좋은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고

이 소설이 그 고민의 결정체가 되었다.


1970년대생의 고민은
사실 1981년생인 나의 고민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우리 세대는 
식민지 시대를 살아서 자아분열을 보일 이유도 없었고,
전쟁의 무시무시함을 직접 체험한 것도 아니고,
가족들 중 이산가족이 있거나 월북한 사람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기억 못할 나이에 지나쳐버린 유신의 그림자를
직접 봤다고 말할 수 있는 나이도 아니다.

우리네가 정확히 말할 수 있는 부분은 오직 하나.
문민정부 이후의 팽창하는 물질만능주의에 관한 것 뿐이다. 

그러나 김연수는 단순히 물질만능주의의 폐해에 대해 기록하는 소설을 쓰지 않았다.
그는 그가 직접 살아보지도 않은 시대의 정치사를 정확히 짚어내며, 
어떻게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시대(90년대)가 열리게 되었나에 대해 주목한다.

그 고민은 
90년대를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주인공 송찬명, 최민식 같은 인물을 중심에 놓고
자기네들의 의지를 일방적으로 관철시키려는 기성세대들을 주변에 배치시키고 충돌시킨다.

각 기관들마다 추구하는 의지는 뚜렷하다.
그리고 그 의지마다 최우선으로 두는 가치가 있고, 그 의지 덕에 발생하는 폐해가 존재한다.
김연수는 예리하게 그 폐해에 주목하고,
어떤 의지로든, 그 의지가 전체주의로 가게되면 역사로부터 퇴행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가슴이 아픈 건 그러면서도 동시에 파고드는 좌절감이다.

 

 

보기 좋은 카페에서 느끼는 절망감, 여관비가 없어서 부킹을 못할 때의 비애, 자동차 하나 없는 부모 밑에서 살아야 하는 뼈저린 가난

 

 

그런 시기다.
현실의 90년대. 그리고 지금의 21세기가 그렇다.
철학과 문학이 그 기능을 발휘할 일이 없어진 시대.

그래서일까?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비추어 보라며 손거울을 들고 나타난 것도
팔다리, 사지멀쩡한 사람들 중 누군가가 아닌 거대 자본 디즈니의 대표모델 '도널드덕'이다.

주인공 최민식은
전체주의에 저항하고,
개개인의 소소한 행복을 향해 걸어가겠다고 선언 하지만,
어째서인지, 누구의 이론 덕분인지,
현실의 이 세상은 말이 좋아 경제민주주의의 카테고리, 
나쁘게 말해 천박한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해 있다.

아,
소설은 그렇게 마무리 되고 만다.

개개인이 명확한 자의식을 가지고 어떤 가면을 가리키며 걸을 것인가를 선택해야 하노라 말하면서.
그러나 현실은 이미 욕망의 니르바나에 빠진 청춘들로 가득하다.
작가 김연수는 이런 시대를 냉철하게 주시하고 그의 처녀작을 통해 선언했었던 것이다.
이런 시대, 이런 시간을 살고 있는 본인이 
시대의 유감에 대해, 그리고 개개인의 소소한 행복에 대해 
앞으로 쓰겠노라고.

 

 

아마 그래서인가 보다.
학부생 때 그렇게 읽어놓고,
다시 또 그의 처녀작부터 다시 차례대로 읽어보자고 책을 긁어모은 이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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