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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 자유로운 영혼이 되기까지의 여정

글쓰는아빠 2021. 8. 9. 09:22

 

(2018년 이전에 다른 사이트에 최초 작성했던 글을 다시 퍼온 글입니다.)

 

 

 

 

 

오랜만에 읽은 좋은 책이었다.
헌데,
인정할 수밖에 없는 좋은 책이라서... 오히려 부가적으로 받은 짜증이 엄청나게 컸다.

아, 나의 모순이란...

 

 

 

 


 

그리스인 조르바는 어쩌다 추천도서가 되었는가??

 

 

사실 언제가부터 귀에 좀 거슬렸다.

 

 

그리스인 조르바, 읽어봤어요?

 

 

이게 자꾸 반복해서 들리니 좀 의아했다. 
하기사 좋은 책은 권유받기 마련이다. 
근데, 주변에서 너도나도 좋다고하면 우선 의심이 드는 것도 당연지사.

그래서 기회되면 읽어보자- 하고 미뤄뒀던 게 사실.
심보도 고약해서 여기저기서 올라오는 리뷰도 모른 척했던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혹 보였던 글들과 들리는 소문들까지는 어찌할 수 없었다.
그걸 대략 추려보자면...

 

 

1. 나도 조르바처럼 살겠어!
2. 나는 좀 읽기 어렵던데?

 

 

대략 두 가지 정도가 되겠다.

그리고 실제로 책을 다 읽고 나서 다른 이들의 리뷰를 보고자 잠시 둘러보니...
아니나 다를까,

 

 

너무나 인간적인 조르바, 이 책은 그의 자유로운 영혼에 대한 이야기다.

 

 

대략 저런 느낌들로 리뷰들을 남기고 있었다.

그리고 나의 불쾌감은 바로, 거기서부터 타오르기 시작했다.

 

 

 

과연, 시대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한 인간의 자유분방함만을 말하는데 450페이지나 썼을까??

 

 

일단 딱 부러지게 이야기를 하자면,
조르바의 그런 자유분방한 매력을 느끼기까지...
전체 중 서두에 해당하는 82페이지까지만 읽어도 충분히 알게 된다. 

 

 

어쩔 수 없어요, 두목. 사실이 그러니까. 내가 콩을 먹으면 콩을 말해요. 내가 조르바니까 조르바같이 말하는 거요.

 

 

이 문장만으로도 이미 조르바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모든 부연설명이 필요없어져 버렸다. 

그는 어디서든 여자를 탐하고, 내키는 대로 말을 하는 인간.
속된 말로 '꼴리는 대로 사는 인간'이다. 

그리고 리뷰를 남긴 대부분의 독자들이 그의 그런 '내 꼴리는 대로 살자'에 초점을 두고 평을 남겼고,
그것이 입소문이 되어 이 오래된 고전은 현재도 차트 역주행 중이시다. 

그래서 좋은 책을 만났지만, 

나는 허탈하다.

 

 

카잔차키스, 조르바를 통해 불교의 '空'사상을 말하다.

 

 

이 책이 당시 노벨문학상 후보에까지 오르고 지금까지도 재조명 받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조르바'라는 인물의 '현대성'에 있다.

이 '현대성'은 아이러니하게도 수 세기 전 석가모니 붓다께서 남긴 '공(空)'에서 비롯된다. 

실제 카잔차키스 본인이기도 한 작중 화자는 끊임없이 '붓다'에 대해 연구하는 모습을 보인다. 헌데, 그의 연구는 책상머리 연구다. 반면, '조르바'가 보이는 행동들은 단순명료해 보이지만, 그 행동들 하나하나에 열정과 진정성이 담겨 있고 오히려 그런 행동들이 '붓다'의 '공(空)'사상에 더 근접해 있다. 

(과거의 유럽에서 '공(空)'사상이라니? 이미 대박이지 않은가?)

 

 

천상천하 유아독존...

 

 

석가모니가 깨우침을 얻고 외친 한 마디, 천상천하 유아독존. 
이미 깨우침을 얻은 입장에서는 그 행동들에 거침이 있을 수 없고, 불필요하거나 타인에게 해가 되는 행위 또한 없다. 만약, 타인에게 해가 되는 게 있다면, 그건 모두 인과에 의한 것이며, 생의 업(業)에 의한 것이다. 

실제 조르바는 작품에서 툭하면 여자를 취하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본인의 돈도 아닌 회사 돈을 써서 여자를 취하는가 하면, 수도원에 방화를 지시하는 등의 절대적 도덕규범을 어기는 행위들을 쉽게 보여주고 있음에도 그의 행동들은 그만큼이나 쉽게 용서가 된다. 

왜 그런 것일까?
하나씩 짚어보자.



핑계없는 바람둥이가 있겠냐만은, 그렇게 치자면, 조르바는 단연 으뜸이다.
여자를 취함에 있어 그는 확실한 자기만의 가치기준이 있다. 그리고 그 가치는 불교의 '자비'와 뜻을 같이한다. 

현대의 여성독자들 입장에선 굉장히 불쾌하겠지만, 조르바는 '그 시대'의 페미니스트였다. 여자를 단순히 남자의 성욕해소, 애낳고 살림만 하는 어떤 '기계적인 도구'로 인식하고 그쳤던 '당시의 남자들과는 달리' 오히려 여자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헤아려주었던 것이 조르바다. 

늙으막의 부불리나를 품어주었고, 결혼서약을 이행하였고, 그녀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했던 조르바. 그녀의 죽음 앞에서 여전히 숨이 붙어있음에도 곡을 하려는 노파들, 그녀의 닭을 삶아 먹으려는 총각들, 살림살이들을 빼가려고 줄을 서 있던 동네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뿐인가? 

그 마을의 다른 남자들과 '여자들'은 과부가 총각의 청혼을 거절했다는 이유-그리고 그 때문에 그 총각이 스스로 자살을 선택했다는 이유-로 과부를 공개처형함에 있어 망설임이 없었지만, 작중 화자와  조르바만이 연약한 과부를 지지하였고, 심지어 조르바는 자신의 목숨이 위협받을 수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싸움까지 하게 된다. 이건... 백마를 탄 왕자, 기사(Knight)의 수준이 아닌가??

게다가 많은 페이지에 걸쳐 조르바는 여인들의 기구한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사랑을 잃은 채 과거의 영광과 그 환상 속에서 여전히 새로운 사랑을 기다리고 있는 늙은 여자들. 조르바는 정황적으로 다른 여자들을 취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번 우선적으로 그런 여자들을 먼저 찾는다. 

(물론, 늘 그런 것은 아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작중화자와 멀어져 있는 상태-그것이 과거이든, 현재이든-에서는 조르바도 나이 어린 여자들을 쉽게 취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때문에 화자와 조르바의 동선과 물리적인 거리의 변화에 따른 그들의 행동 변화를 지켜보며 읽는 것도 소소한 재미가 있다.) 



다음으로, 회사 돈으로 롤라와 놀아나다 돌아왔을 적에도 조르바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그 이전까지 그토록 말해왔던 

 

 

두목, 내가 뭐라고 했소. 여자들이란 원래가...

 

 

그만의 독특한 '자비' 사상, 연약한 여자들을 위하는 마음을 당당하게 말하며, 손실된(?) 회사 돈을 되찾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이 부분이 눈여겨 볼만한 대목인데, 그만큼 조르바는 '일', '경제력'에 대한 자신만의 자부심이 대단하다. 본인이 노력한다면, '제물'은 언제든지 다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곧 '자기 결정성'과 연결된다. 매사를 행함에 있어 '자신의 결정'으로 '내일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완벽한 믿음. 그것은 또다른 형태의 '자비'다. 다시 말해, 강자가 약자에게, 상처입은 자가 상처입힌 자에게만 자비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매사를 결정하는 주체적인 내가 주변 환경과 인물들에게 자비를 보이는 것이다.

(실제 이런 행위가 우리들 인간관계에서 발휘되면, 두 사람 이상의 관계에서 늘 긴장감을 주는 역활은 '자기 결정성'이 강한 사람이 맡게 된다. 음, 그러니까 에-또, 갑을관계 형성을 곧잘 해내고, 늘 갑이 되는 인간이다...)


아무리 그래도 수도원에 방화를, 그것도 본인이 직접 저지른 것도 아니고 누군가를 부추켰다는 점은 해도해도 너무한 것이 아닌가 할 수도 있지만, '자하리아'라는 인물을 통해 작품 내에서 당시의 수도원이 얼마나 타락했는가를 여과없이 보여줬다는 점에서 이 역시도 상쇄된다. 게다가 옳지 못한 것, 그른 것, 존재하기 때문에 부정적인 것을 불로 태워 재로 만들어 없앤다는 설정도 '공(空)'으로 연결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럼, 조르바는 처음부터 붓다급의 먼치킨이었을까??

 

 

그렇지가 않다.
조르바라는 인물이 처음부터 결코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는 점이 이 소설의 핵심 중 하나다.

그가 어떻게 세상과 함께 살면서도 '관여하지 않는 인간'이 되었는지, 
한 여자가 아닌 모든 여자에게 충성하고, 민족이나 국가 따윈 개나 주라고 윽박지르는 인간이 되었는지,
무너지는 갱도에서 살아 돌아와서도 고개 하나 까딱하지 않을 수 있는지...

그에게도 비극이 있고, 그 비극이야 말로 조르바를 해탈에 이르게 한 열쇠이며,
끊임없이 화자로 하여금 자극을 줄 수 있는 원동력이다. 

 

 


우선 그 해탈의 열쇠는 대략 본문 320여 페이지쯤부터 해서 나와있으니 자세한 스포는 스킵하도록 하겠다.

그보단 왜 많은 독자들이 이 부분까지 천착한 내용을 밝히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
나를 괴롭힌다.

많은 리뷰들을 돌아보았지만, 
화자와 화자의 친구, 스타브리다키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그저 자유분방함과 열정에 대한 어떤 워너비로의 조르바에 대한 언급들이 다수를 차지할 뿐이다. 그러나 장치적으로도 스타브리다키의 존재는 중요하다. 그의 요절을 통해 조르바의 평소 주관이 더 주목받게 되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며, 그러지 못하고 있던 화자를 나무라며 헤어졌던 친구. 그 친구 때문에 생의 자극을 받아 만나게 된 조르바. 그러나 국가와 민족을 위하겠다던 그 친구는 요절을 했고 화자에게 슬픔만을 남겼지만,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에 관여하지 않겠다던 조르바는 더 오랜 세월을 살며 마지막까지 화자에게 스스로와의 투쟁에 대한 끊임없는 자극을 주게 된다. 

이러한 설정과 사실이 중요한 이유는 이념 이전에 '생명'과 '사랑'을 더욱 중요시하는 작가 본인의 철학에 기반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대체 왜 많은 리뷰들은 이런 아름다운 부분들을 대략 생략하고 본문 중 80여 페이지만 읽으면 그냥 알 수밖에 없게 되는 조르바의 표면적 성격만을 말하고 있을까??

 

 

 

넘에게 좋은 약이 나에게도 무조건 좋은 약은 아니다.

 

 

그래서 동의보감의 허준 선생도 그러지 않았던가?
사람마다, 그 증상마다 약을 달리해야 한다고...

헌데,
우리의 독서환경 자체가 그렇다. 이렇게라도 평타 이상의 좋은 책, 나름의 고전 축에 속할 법한 것을 읽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솔직히 현재의 우리는 민간단위에서 좋은 책을 건강하게 선정하지는 못하고 있다. 최소한 지역과 동네, 작은 서점들 단위에서라도 여러 다른 책이 잠재적인 독자들에게 소개가 되어야 하는데, 우린 그 이전에 획일화 된 대중적인 정보로의 도서추천을 인터넷에서 먼저 만나버리게 되는 것이다. 

(82년생 김지영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한국이면서 동시에 마초덩어리인 조르바가 여전히 꾸준히 읽히고 있는 한국이다. 이 모순, 이 괴리감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까???)

어떤 방송을 통해, 어떤 미디어를 통해, 어떤 사람들을 통해, 어떤 권위에 의해,

독자들은 오늘도 책을 소개받고 자신만의 독서리스트에 추가를 한다. 그리고 재미나게도 그 리스트라는 건 나름 트렌디하다. 

책만큼 유행과 별개여야만 하는 장르도 없다.
유행에 따라 읽히는 책은 오히려 오래가지를 못한다.
스테디셀러가 되어 전지구적으로 읽히는 책들은 어떤 유행에 의해서가 아니다. 

인류가 끊임없이 '아름다움을 발견'하려고 하기에 벌어지는 어떤 것이다. 

반면,
유행에 의해 폭발적으로 크게 읽히는 책들은 그 시기를 지나면, 다시 읽히지는 않는다. 

 

 

 


 

그럼, 그리스인 조르바가 그저 그런 책이었던가? 반세기도 전에 쓰인 소설이 그것도 지구반대편에서 지금까지 읽히고 있으면, 충분히 스테디셀러가 아니겠는가?

맞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훌륭한 책이며, 앞으로도 읽혀지면 좋을 책이다. 

다만
나의 심술이 발동한 부분은 그렇지 않아도 꾸준히 읽히던 책인데, 
최근 들어 '차트를 역주행'하면서까지 읽히던 것에 대한 반발심이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게 된 그 배경에 대한 것이다.

 

 


 

 

내가 한 때 롤모델로 삼았던 김영하 작가의 '살인자의 기억법'은 결코 '그리스인 조르바' 만큼 읽히지는 못할 것이다. 지금은 영화까지 나왔지만 오래지 않을 거다. 

그건 영하 형의 작품이 더 못해서도 아니고, 조르바가 더 잘나서도 아니다. 

그렇게 굳어버린 우리들(한국 독자와 한국 작품들)의 신뢰관계다. 


우린 우리 의지와는 별개로 근대문학을 강제로 이식 당하다시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만의 '근대문학'을 '대중문학'으로 발전시키질 못했다. 
덕분에 우린, 
현재 우리만의 전세계적 콘텐츠를 꾸준히 생산해 내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니 다른 장르라 하더라도 영화감독 봉준호의 옥자, 괴물은 칭송받아 마땅하다.)

물론, 하루키 선생을 비롯한 일본 작가들이 껍데기만 일본인이고 
사고를 지극히 서구적으로 하는 등장인물들을 앞세워 세계적으로 읽히고 있는 현실을 보고 있자면,
과연 대체 그 나라만의 근대적 대중문학이란 무엇인가... 싶기도 하지만...

확실히 우린 다같이 우리들의 대중문학, 대중소설을 자라나지 못하게 하고 있는 중이기는 하다.
(물론, 독자보단 문단의 폭력, 출판사들의 상술이 더 문제라고도 보지만...)

정말 지금까지 나온 우리나라 소설들 중 서사적 완성도와 내용 면에서 
조르바만큼의 어떤 소설이 우리에겐 없었던 것일까?

당장 나조차도 최근 십년 동안 한국소설을 부지런히 읽지 않아서 그건 잘 모르겠다...



아....

조르바가 좋은 책인 만큼, 딱 그만큼,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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