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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셉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 - 관념적 묘사와 서사 진행의 힘

글쓰는아빠 2021. 8. 11. 20:39

민음사세계문학전집 7권에 속하는 조셉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
아무래도 외국인이다보니
이름과 제목을 표기하는데 있어서 출판사 별로도 차이가 있다.

 

 

 

Heart of Darkness 가 원제다. 조지프 콘래드, 죠제프 콘래드, 조셉, 죠셉 등 이름을 표기하는 것도 조금씩 차이가 있다.

 

사실 뭐,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다.
중요한 건 그가 '영국문학을 대표하는 폴란드 태생의 작가'라는 점이고,
뱃사람 생활을 오래했다는 점, 그리고 그런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을 썼다는 점이다.

 

 

이미지 출처 - 위키디피아

 

 

그의 이런 독특한 이력과 '제국주의의 환상을 떨쳐내지 못했던 대영제국'이란 시대 환경이 맞물려 탄생한 소설이 '암흑의 핵심, (또는 어둠의 심연)'이다. 

 

 

 

 

사실 책을 읽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이 책에 대해 말하기란 쉽지가 않다. 
그건 당장 이 책의 제목이 번역자에 의해 다르게 번역되었다는 점부터가 그렇다.

조지프 콘래드는 폴란드인이었으며, 뱃사람 생활 이전에는 영어 한 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뱃사람 생활을 청산하고 글을 쓰기 시작할 쯤의 그는 정확한 영어, 아니, 당시로는 굉장히 세련된 문체를 구사하는 수준을 넘어 어지간한 영국인들 뺨을 후려칠 정도로 정확한 문장을 구사했다. 

어렵게 설명하느니 다음의 사진 한 장, 아니, 본문 한 문단을 보도록 하자.

 

 

단순한 장면 묘사임에도 불구하고... 번역자의 노고를 보라...

 

 

작품 도입부다. 사건을 들려주는 주인공 화자, 말로가 그의 동료들과 템즈강 하구에서 일몰을 지켜보는 장면이다. 단순 장면 묘사임에도 불구하고, 순간을 묘사하는 부분에 있어서 '압도적이라 문장의 벽'을 보여준다. 번역자가 이 짧은 한 장면을 옮겨오기 위해 애쓴 흔적들을 보자. 원문을 최대한 충실하게 옮겨오기 위해 '백열', '사색'과 같은 한자어를 굳이 차용했음을 차치하더라도 '빛도 열기도 없이 탁하기만 한 붉은색' 같은 표현을 영어로 완벽히 구사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뿐만이 아니라, 조셉 콘래드는 작품 전체적으로 중의적인 표현들과 관념적인 묘사, 등장인물들 초라하게 만드는 환상적인 배경으로의 정글을 묘사하게 되는데, 그래서 그런지 무엇하나 직관적이거나 명확한 것이 없으며, 독자로 하여금 많은 걸 기대하게 하고, 상상하게 하지만, 동시에 원하는 이야기는 들려주지 않은 채 끊임없이 비껴가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필자는 그래서 현재 책을 읽고나서 글을 쓰고 있는 입장이면서도 여전히 연결고리 하나를 잃은 채다. 그의 작품을 명확히 이해했다거나, 나만의 관점에서 이런 식으로 해석되어진다고 말하기가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다.

게다가 문장과 인물들의 심리묘사, 심적변화 보단 이야기를 종반부까지 끌어가는 사건들의 나열, 이야기 그 자체, 서사의 테크닉 완성도를 더 우선으로 보는 요즘 현대소설들과 너무나 다른 분위기의 소설이라 감정이입 자체가 힘든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이 소설에 강한 흥미를 느끼고 있는 건 독자로 하여금 무한한 상상력에 빠지게 한다는 점에 있다. 작품 전반에 깔린 관념적 묘사와 서사 진행은 지금의 필자처럼 연결되지 않는 연결고리를 좇게 만든다. 


우선 어지러워질 수 있으니 먼저 작품의 구조에 대해 정리를 해보자.

1. 말로가 동료들과 템즈강 하구에서 썰물이 오기를 기다리며 과거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
2. 과거, 말로가 아프리카 콩고 지역에 가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함.
3. 고용된 그의 임무는 강 상류층까지 거슬러 올라가 본국으로 '상아'를 수집하여 보내주던 '커츠'라는 사람을 데리고 오는 일.
4. 그러나 '커츠'를 만나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강 하류에서 기선을 직접 수리해서 강을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수리에만 몇 달씩 꽤 긴 시간을 허비하게 된다.
5. 강 상류로 가기 위해 애쓰던 중에 그곳의 모든 사람들이 '커츠'를 우러러 보고 있음을 알게 된다.
6. 점점 더 '커츠'에 감정적으로 동화되어 가게 되는 말로.
7. 그러나 강 상류에 이르렀을 때 말로가 목격하게 되는 것은 '커츠의 실체'. 게다가 커츠는 말로 앞에서 '두려워, 두려워'라는 말을 남기고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8. 영국으로 돌아온 말로. 커츠의 죽음을 커츠의 약혼녀에게 알린다.
9. 말로가 길었던 과거 이야기를 마치고 썰물에 배를 몰고 출항하며 결말.

굵직한 사건들을 정리하자면, 위와 같겠다.
그러니 이걸 더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말로라는 뱃사람이 미지의 아프리카 콩고로 '커츠'라는 실력자를 찾아나게 되고, 탐험 끝에 그를 찾았지만, 그는 곧 숨을 거두고 만다. 말로는 그의 부고 소식만을 손에 쥔 채 영국으로 복귀한다.

 

정도가 되겠다. 

하지만,
이야기의 실체는 이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우선 당시의 시대 상황과 말로의 심리상태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작품의 도입에서부터 주인공 말로는 로마 제국을 언급하며, 제국주의에 대한 긍정을 내비친다.

 

당시는 대영제국의 제국주의가 한창인 시절이다. 이야기의 초반부터 말로는 그런 제국주의를 이상적으로 보고 있는 태도를 여러 차례 보여준다. 

작품이 흥미로워지는 건 그런 인물이 아프리카에 닿게 되면서부터 점점 달라지게 된다는 점이다. 우선 '야만인'을 관리한다는 명목으로 보여지게 되는 '백인들의 태도'가 조금씩 언급되더니 강 하류에 이르러서는 '교화된 야만인'과 '교화시킨 백인'을 보여주며, 작품 내에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한 적이 없지만, '교화된 야만인'이 그간 얼마나 고생스러웠을지를 상상하게끔 만들어주게 되는데 이쯤에서부터 말로의 심리가 크게 변화되기 시작한다.

이런 화자의 심리적인 변화는 말로가 '커츠'라는 의문의 인물을 찾아가는 외형적인 사건과는 별개로 진행되는데, 동시에 화자, 말로는 주변에서 듣게 되는 '커츠'라는 인물의 평을 들으며, 점점 더 만나지도 않은 그에게 끌리게 되는 것은 물론, 은연중에 본인과 '커츠'를 동일시 하는 듯한 모습도 종종 보여주게 된다.

다시 말해, 이 소설은 인물의 내적 변화가 동시다발적으로 진행이 되기 때문에 독자들이 사건을 구분해가며 읽지 않게 되면, 쉽게 모순의 늪에 빠져버릴 수가 있는 것이다. 
인간의 내면이란 게 원래 그렇지 않은가? 늘 모순이 충돌하고 있고, 매사를 이성적으로 구분하지 못하지 않는가? 조셉 콘래드는 그런 면에서 대단히 탁월하다 할 수 있겠다. 그런 복잡한 심리변화 상태를 각각의 내외적 사건들을 이용해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작품의 긴장감은 말로가 커츠를 실제 만나는 지점에서 극대화된다. 그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주변인들의 평에 의해 말로는 커츠를 대단한 '담론가' 정도로 예상을 하고 있었는데, 실제 현장에서 맞이한 건 그의 광기에 불과하다. 

이 부분도 흥미로운 것이 주변인들은 항상 커츠에 대해 말을 할 때, <그가 얼마나 위대한지>, <그의 이상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말로에게 말하려 했다고 묘사를 하지만, 실제 독자들이 그 부분에 대해 구체적으로 읽을 수 있는 문장은 단 한 문장조차 없다. 다만 저 정도의 언급만을 제공하며, 화자인 말로 역시 그래서 그가 대단한 '담론가'가 아니었을까 예상해보는 정도였다는 정보만을 얻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독자들이 목격하게 되는 커츠의 공간은 말로가 당시 겪었을 당혹감과 동일시되는 효과를 준다. 무수한 기대와 상상과는 달리, 그는 단지 약탈자였다. 원주민들을 선진화된 문명인 '총'으로 억압하여 끊임없는 약탈을 일삼아 왔을 뿐이었다. 그의 그런 광기는 이미 오래 전에 극에 달했고, 그 과정에서 원주민들의 목을 따 창에 꽂아 내걸어 버리는 행위도 서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런 그의 잔혹함에 원주민들은 그를 신처럼 모시기에 이른다.

문자 그대로, 커츠는 그간 그가 스스로 쌓아올린 '왕국'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영국의 문명인이 미지의 아프리카 콩고에 상륙하여 벌인 짓이란 게 결국 '약탈'과 '살인'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커츠라는 한 개인은 광기에 휩싸여 고국으로 돌아올 상상조차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럼, 무엇이 이 문명인을 미치게 만든 것일까? 

커츠에 말에 따르면, 커츠가 그토록 노력(?)하여 보낸 상아들에 대해 커츠는 본국으로부터 어떤 보상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츠의 주변인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식민국가의 현지에서 출세를 꿈꾸는 다른 백인들은 <그가 얼마나 위대한지>, <그의 이상이 얼마나 대단한지>만을 말하며 그저 커츠를 띄워주기에 바쁘다.
그들 모두 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보상과 출세를 위해 그저 '커츠'처럼 되고 싶을 뿐인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커츠는 반복하여 약탈과 살인을 저지를 수밖에 없다. 누가 어떻게 생각하든, 현실의 그는 미지의 아프리카 그 중앙에 있는 상태고, 거기서는 때때로 본국에서 보내오는 '문명의 이기들', 그 물자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도 없는 상태다. 커츠는 스스로의 상태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 거듭 죽이고, 약탈했던 것이다. 문자 그대로 그것 외에는 어떤 선택지도 없던 곳이니까...

 

 


원주민을 야만인으로 보던 말로의 인식도 이쯤에 이르러 많은 변화를 보이게 된다. 여전히 자신과 동등한 생명체, 백인으로 인식하는 수준은 아니지만, 자신들을 위해 노동력을 제공해준 주체로 인식하게 되며, 그런 그들의 죽음이 명예롭지는 못하더라도 시신이 훼손되는 것은 막으려 하는 모습은 보여주게 된다. 

그리고 작품 초반부부터 스스로 콩고를 다녀오지 않았다면, 여전히 '짐승과 같은 존재'였을 것이라고 말을 했다는 점에서 확실히 그의 내면에서는 어떤 변화가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렇게만 보면, 작품은 어떤 대칭을 이루며 자연스런 귀결에 이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필자가 말했던 풀리지 않은 연결고리는 다른 지점이다. 바로 커츠의 마지막 대사. 

 

 

 

두려워, 두려워!

 

 

광기에 휩싸였던 그를 두려움으로 내몰았던 것의 정체는 정확히 무엇이었을까? 아니, 조금 더 노골적으로 묻자면, '암흑의 핵심, 어둠의 심연'이란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최근까지도 비평가들은 이 작품을 당시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이라고 보는 쪽이 있고, 그러기엔 말로의 인식과 태도가 모호하여 단정지을 수는 없다고 보는 쪽이 있다고 한다. 그것도 그럴 것이 소설의 초반부터 현재시점의 말로가 여전히 로마제국을 떠올리며, 제국주의를 미학적인 이상향으로 상기시키고 있으니 말이다. 

필자 역시도 양측의 의견이 얼마간은 공감이 되면서 동시에 의문이 강하게 든다. 그 의문이란 것은 단순하다. 이 소설을 제국주의를 부정한 어떤 것이라 보기 이전에 작품 속에서 커츠를 두렵게 만든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건 소설을 읽는 관점에 따라서 참으로 다양하게 해석이 가능한 부분이며, 이 질문에 대한 답에 따라 비평가들의 입장도 정리가 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그렇지만, 앞서도 말했듯이 이 소설 자체가 워낙 객관적인 정보를 적게 제공하며, 동시에 관념적인 서술과 묘사를 과하게 제공하고 있어 많은 것이 모호할 뿐이다. 

이런 모호함 속에 빠져있을 때, 이 책을 함께 읽었던 '팔색조 모임'의 선배님이 이런 의견을 말씀해 주셨다.

 

 

그건 혹시, 대자연 같은, 그러니까 가이아(Gaia) 같은 건 아니었을까요?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 요즘이다.
'문명인'조차 어찌할 수 없는 '절대적 상대', '정복한 걸로 오인하고 있지만, 절대 정복할 수 없는 상대'라면, 커츠의 두려움도 납득이 된다. 스스로 그곳을 정복하였고, 총칼로 다스리고 있는 왕국이라 여기고 있지만, 사실은 그 갑절의 광기로 자아를 무너뜨리고 무기력하게 만드는 절대적 존재야 말로 암흑의 핵심이며, 어둠의 심연이라면 말이다. 

실제 책의 곳곳에선 원주민들이 밀림의 그늘 곳곳에 어둠처럼 스며들어 있는 듯한 묘사로 연출되곤 한다. 그리고 위기쯤에 이르러서는 강을 내려가기 위해 배에 타고 있던 백인들이 밀림의 저편에서부터 습격해오는 원주민들의 공격에 당황하며 총을 갈겨대는 장면이 나오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아주 냉소적인 문장을 보여주기도 한다.

 

 

 

물론, 나름 정리를 해봤다고는 해도, 이 역시도 어디까지나 많은 의견들 중 하나에 불과하리라.

 

 


확실히 요즘 소설에 길들여진 나의 입맛과는 많은 부분에서 맞지 않았던 소설이지만, 
상상력을 자극하고, 그 상상력을 디테일하게 다듬어가도록 불을 단단히 지펴줬다는 점에서 굉장한 소설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그의 다른 작품들을 찾아서 읽어볼 생각같은 건 나지 않지만,
확실히 그에게서 뭘 배워두면 좋은지는 알 것 같은.

그런 소설이었다.




p.s : 민음사의 작품 나열 순서가 점점 더 매혹적으로 느껴지는 요즘이다.
        허클베리 핀에서 엿봤던 노예제도, 인류평등의 문제.
        그 원류를 찾아 다시 거슬러 올라간 느낌이랄까? 다음 책도 기대가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책이 영화 지옥의 무시록과 콩 등에 영향을 줬다는 건 안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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